그렇다면 이제 남은 과제는 특별한 관찰력을 기르는 것이다. 작문 시험을 앞두고 있다면 당분간은 ‘관찰력 풀 가동 모드’로 살아야 한다. 이제와 새로운 경험을 하겠다며 덤빌 게 아니라 지하철을 타며,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영화를 보며, 길을 걸으며 짬짬이 작가의 눈으로 일상을 관찰하라는 뜻이다.
그런 뒤 기록해야 한다. 경험하거나 관찰한 것, 그에 대한 생각을 간략하게 일기 형식으로 적어둔다. 이런 식이다.
단상 메모
남자친구와 ‘선물’ 때문에 다툼. 남친은 내가 사달라는 걸 사주는 게 최고의 선물이라는데. 나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고민하는 시간이 빠진 선물이 과연 의미 있을까.
단상 수준의 생각이라도 꾸준히 메모한다. 물론 이 메모 모두가 작문으로 발전하는 건 아니다. 오직 나에게만 의미 있는 메모도 분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메모가 시간이 흐르고 꾸준히 ‘독서’라는 물을 주었을 때, 새싹이 싹을 틔우듯 어느 순간 작문이 된다. 성찰에 필요한 적당한 시간과 독서가 메모를 작문으로 발아發芽시키는 것이다.
단상 메모에서 작문으로
크리스마스이브, 남자친구와 가벼운 말다툼을 했다. 선물 때문이었다. 없는 시간을 쪼개고, 텅 빈 통장을 긁어모아 넥타이를 선물했는데 그는 역시나 빈손이었다. 예상 못한 결과는 아니었다. 그의 ‘선물론’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받는 사람에게 최대치의 효용을 선사해야 한다는 선물 철학을 가진 남자친구는 나더러 함께 백화점에 가서 원하는 선물을 고르라고 했다. 선물의 가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는 거라고 말하며 나는 토라졌다. 상대에게 결핍된 것을 고민하는 시간이 빠진 선물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대차게 쏘아붙였다. 그러나 남자친구의 ‘한 방’에 나는 삐죽 내밀었던 입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직접 산 물건보다 선물 받은 물건의 가치를 20%나 낮게 본다는 한 대학의 연구조사를 그가 인용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아령같이 너에게 아무 쓸모없는 걸 선물하면 어떻겠어?” 그는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경제학은 힘이 셌지만, 낭만은 빈틈이 많았다.
돌아오는 길, 갑자기 <크리스마스 선물>이란 동화가 생각났던 것은 그래서였다. 그의 경제학에 한 방을 먹일 궁리를 하다 어려서 읽었던 그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로를 끔찍하게 위하던 부부가 서로에게 아무 쓸모없는 물건을 선물하고서도 최대치의 행복을 느꼈던 그 이야기. 그 길로 원작을 집어 들었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아무래도 시대상이 더 자세히 들어난 건 동화보단 원작 쪽이었다. 돈이 된다면 무엇이든 팔아야 했던 미국의 황금만능주의 시대가 배경이었다. 둘은 그 시대의 희생양이자 승리자였다. 아내는 부잣집 사모들도 부러워했던 탐스러운 머리칼을 팔아야 했지만 대신 남편의 온전한 사랑을 얻었고, 남편은 가문의 자랑인 시계를 팔았지만 아내의 희생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부부가 서로를 위해 마련한 선물은 아무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지만 이들은 꼭 필요했던 물건을 선물 받은 것보다 더 진한 행복을 느낀다. ‘무가치성의 가치’로 물질만능주의 시대의 뒤통수를 때린 사건이었다.
당시의 미국만큼이나 시장 논리가 힘이 센 오늘날 대한민국을 보면서 사람들에게 한 권의 책만을 권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선물하리라 마음먹었다. 숨 막히는 경제학의 뒤통수를 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빈틈없는 경제논리가 아니라 ‘인간 논리’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싶어서다. 눈에 보이지 않고,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사랑이나 인간애야말로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되는 시대를 뛰어넘는 유일한 자원이다. 경제학자들을 골치 아프게 하는 현상 중 하나가 ‘선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이 흐른 뒤였다. 경제적 효용은 현금이 제일인데 굳이 시간과 에너지를 써가며 선물을 주고받는 이유가 무엇인지 경제학의 언어로 설명하려고 골몰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無)가치가 지닌 거대한 가치를 아는 나는 슬며시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