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마다 불안한 당신에게 사르트르가 전하는 말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
사르트르 하면 “실존이 본질을 앞선다”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실존은 무엇이고, 본질은 또 무엇일까요?
의자들이 있어요. 모양도 색깔도 크기도 각각 다르지만 모두 의자예요. 심지어 나무박스도 의자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이 앉을 수 있으니까요. 의자의 본질은 사람이 거기에 앉을 수 있다는 거예요. 여기서 본질은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 목적’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본질을 갖고 있어요. 신발의 본질은 사람의 발을 보호하는 것이고, 우산의 본질은 비를 피하게 하는 것이죠.
사람은 각기 피부색도 생김새도 다르지만 모두 인간이라고 하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인간인가요? 생각할 수 없어도 인간은 인간이에요. 그러면 인간의 본질은 뭐죠?
인간에게는 본질이 없어요.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목적, 기능 같은 것이 없어요.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거예요. 심지어 존재하고 싶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에요. 혹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사람 있나요? 우리 모두는 그냥 태어났으며, 그냥 세상에 던져진 존재자예요. 이것을 피투성(被投性)이라고 해요. 이처럼 인간이 태어난 목적, 기능 혹은 가치는 없고 그냥 실존하는 존재자라는 것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의 뜻이에요.
자유를 ‘선고받은’ 인간
인간은 실존이 본질을 앞서는 존재이기에 자유예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규범도, 무엇을 해야 한다는 의무도, 주어진 역할도 없어요. 그런데 이것이 좋은 건가요? 글쎄요. 내가 민족중흥의 사명을 띠고 태어났으면 그것을 위해 살면 되고,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 태어났으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살면 돼요. 그런데 인간한테는 그런 사명 같은 것이 없이 무엇을 하든 자신의 자유예요. 이런 자유가 좀 부담스러울 수 있죠.
그래서 사르트르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거예요.
선택과 불안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은 결과 매 순간 어떤 선택에 직면해요. 대학원 진학을 할지, 직장생활을 할지, 결혼을 할지, 비혼을 할지, 투표를 할지, 복지제도에 찬성할지를 선택해야 해요.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할지, ‘해야 할 일’을 해야 할지 선택해야 하죠. 정답이 없기에 선택은 어려운 일이에요. 인간에게 주어진 목적이나 기능이 없으니 정답도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불안해요. 그러한 불안은 정답이 없는 문제지를 받았기 때문에 생겨요. 사람들은 불안을 피하기 위해 마치 자기가 어떤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요. 알바를 하는데 마치 천직인 것처럼 몰입하고, 샐러리맨인데 천직이 샐러리맨인 것처럼 한치의 심리적 동요 없이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르트르는 이것을 자기기만이라고 해요. 마치 이것 말고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선택지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거예요.
기투하는 존재
그런데 정말로 우리의 선택에서 정답이 없나요? 사실은 정답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택지가 다 정답이에요. 정답이 뭐예요? 나한테 가장 가치 있는 것이 정답이잖아요.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면 그것이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돼요. 내가 ‘하고 싶을 일’을 하겠다고 선택하면 나의 욕망이 중요한 가치가 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다고 선택하면 나의 의무가 중요한 가치가 돼요.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거기에 가치가 생기므로,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전부 정답인 것이죠.
인간은 선택을 하면서 계속 미래로 나가야 해요. 자유가 불안하긴 하지만, 어떤 것을 선택하면서 미래의 가치를 계속해서 만들어가야 해요. 그래서 인간은 기투하는 존재예요. 자신을 던지는 존재란 말이에요. 기투(企投)란 ‘인간이 현재를 넘어서 미래를 향해 자신을 스스로 던지는 실존의 방식’을 말해요.
앙가주망
인간의 선택은 자유지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해요. 선택이 어려운 이유는 거기에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선택해야 하냐고 묻거나, 나의 선택을 위임하는 이유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전가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물을 필요 없고, 그냥 선택하면 되고, 그것이 정답인 양 행동하면 돼요.
그럼, 내 맘대로 선택해도 될까요? 그것은 아니에요. 내 선택은 바로 보편적 인간의 선택이에요. 내가 창조한 가치는 바로 인간의 보편적 가치가 돼요. 내가 만든 가치는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가치가 되기 때문이에요. 따라서 나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한테 어떤 영향을미치는지도 고려해야 해요. 이것을 앙가주망, 영어로는 engagement라고 하는데 ‘계약’, ‘구속’이란 뜻이에요. 앙가주망은 정치나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말해요.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사회적 책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냥 던져진 존재자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그것은 우리의 자유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는 순간, 거기서부터 가치가 나온다. 그것은 나만의 가치가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의 가치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예요.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피투성으로 태어났지만 기투하는 존재다.”
이 포스트는 『5분 뚝딱 철학 : 생각의 역사』(김필영)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