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회사가 퍼스트 무버가 될 수 있었던 이유 : 기준은 스스로 정한다
고정관념을 바꾸다
세계 최초의 항체 바이오시밀러 ‘램시마’가 탄생했을 때 셀트리온은 스스로를 ‘퍼스트 무버 first mover ’라고 불렀습니다. 퍼스트 무버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창의적인 선도자를 말합니다. 셀트리온은 이후에도 시장에 가장 먼저 선보인 바이오시밀러에 항상 ‘퍼스트 무버 제품’이라는 타이틀을 달아 홍보했습니다. 바이오시밀러는 오리지널 제품인 신약을 비슷하게 만든 것이니 제일 먼저 출시됐다고 해도 선구자로 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셀트리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개발한 제품이 오리지널과 비교해 뒤지지 않고 경쟁사들보다 앞서가는 선두 주자이기 때문에 엄연한 시장 개척자”라며 꿋꿋하게 밀어붙였죠. 셀트리온이 고집을 부린 덕분인지 언젠가부터 바이오시밀러업계에서는 퍼스트 무버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시장 선점 효과의 중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바이오시밀러 중 가장 빨리 출시된 제품을 자연스레 퍼스트 무버라고 부릅니다. 진짜 1등(오리지널)은 제쳐두고 그다음부터 들어오는 주자들 중 가장 빠른 사람에게 왕관을 씌워주는 셈인데, 이런 이상한 관행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퍼스트 무버로 불리기 위한 속도 전쟁이 한창입니다. 신약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제약바이오업계의 고정관념을 셀트리온이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죠.
누가 어떻게 더 잘할 것인가
전통적인 제약산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신약만이 최초의 발명이자 혁신입니다. 하지만 제약산업의 바깥에 있었던 서정진의 눈에 바이오시밀러는 놀랍도록 혁신적인 제품이었죠.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오리지널 약이 있어도 비싸서 쓸 수 있는 환자가 많지 않으니 가격을 낮추는 것만 해도 대혁신이었습니다. 한국생산성본부에서부터 대우차 시절을 거치면서 줄곧 해온 일이 투입 대비 산출을 높이는 업무 효율 개선이었기에 그는 이 방면에서 전문가였습니다.
서정진은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사업은 없다”는 생각으로 바이오시밀러 사업에 접근했습니다. 정말 괜찮은 사업 아이템은 누군가가 했거나 이미 하고 있는 사업인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더 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서정진은 환자와 의료진의 욕구를 세심하게 파악하고 충족시켜주는 제약사라면 기회를 잡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슈퍼 ‘갑’인 거대 제약사들이 마음대로 주무르는 의료 환경에서 틈새시장은 곳곳에 널려 있었죠.
30대에 창업해 억만장자가 된 사업가 MJ 드마코는 『부의 추월차선』에서 “기회는 욕구와 같이 간단한 것”이라며 “불편을 해결하고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고통을 치유하고 형편없는 사업을 퇴출시키는 것이 모두 사업 기회가 된다”고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기회는 도처에 널려 있으며 그것이 기회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얘기죠. 드마코의 정의를 적용하자면, 바이오시밀러는 바이오의약품 공급 부족이라는 불편을 해결하고, 저렴하고 양질인 제품을 제공하며, 더 많은 환자의 고통을 치유하고, 폭리를 취하는 제약사를 퇴출시킬 수 있는 기회의 조건을 모조리 갖추고 있습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새롭게 본다
서정진은 혁신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다른 제약바이오 회사 CEO들과 달랐습니다. 그들은 바이오시밀러를 복제약으로 얕잡아보고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신약을 내놓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빅파마(대형 제약사)들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서 시장을 본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늘 위에서 보면 백두산이나 한라산이나 고만고만해보입니다. 평지에서 봐야 산이 얼마나 높고 험준한지 알 수 있죠. 이처럼 객관적인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꿈은 크게 가지되 세부 목표는 작게 세워서 하나씩 성취하는 것이 필요하죠.
셀트리온은 자신의 위치에서 바이오시밀러 사업을 바라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혁신을 정의했습니다. 개미 바이오 벤처가 연간 수십조 원을 벌어들이는 공룡 제약사들과 같은 운동장에서 뛸 수 없다는 것을 애초부터 인정하고 작은 것부터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신약 개발사들이 포진한 메이저리그가 아니라 바이오시밀러 개발사들이 모인 마이너리그에서 퍼스트 무버의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입니다.
셀트리온은 바이오시밀러업계에서 게임의 룰을 만들었고 새로운 경쟁체제를 구축했습니다. 그러자 바이오시밀러를 거들떠보지도 않던 노바티스, 화이자 등 거대 제약사들도 슬그머니 발을 들이기 시작했죠.
셀트리온이 스스로를 복제약 회사로 여겼다면 지금처럼 발전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업계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것도 서정진과 셀트리온은 새롭게 바라봤습니다. 바이오 전문가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방식을 셀트리온은 효율적으로 개선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태도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습니다.
이 포스트는 『셀트리오니즘 : 셀트리온은 어떻게 일하는가』를 바탕으로 발췌, 재구성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