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선량함에는 가시가 필요하다
당신의 선량함에는 가시가 필요하다
선량함에는 반드시 가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_ 랄프 왈도 에머슨
선량하기는 총명하기보다 어렵고, 선택해서 얻는 것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보다 중요하다. _ 제프 베조스
누구에게 선한 제안인가
<드림 오브 차이나>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여성이 무대에 올라 공연을 펼쳤다. 객석에는 그녀의 여동생이 있었다. 언니의 공연이 끝나자 카메라가 동생의 얼굴을 비추고 진행자가 대뜸 ‘친부모와 만날 것’을 제안했다. 알고 보니, 동생은 태어나자마자 친부모의 동의하에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집으로 보내졌다. 그 후 20년간 그녀를 사랑과 정성으로 키운 사람은 양부모였다. 그녀가 성인이 되자 친부모는 결국 모습을 드러냈다. 언니와 방송국 관계자들이 그녀 몰래 친부모와 만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방송국까지 데려온 것이다. 동생은 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거절했다. 크게 당황한 동생은 멍하니 있다가, 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거절했다. 진행자는 동생의 거절에 화를 냈다. 보도에 따르면, 진행자는 그녀의 편협한 마음씨에 분노했다고 한다. 친부모가 힘들어했던 점도 고려해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는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 일로 인터넷 및 각종 언론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친부모와 만나야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생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다. 진행자가 동생을 나무란 행위 역시 논쟁의 핵이 되었다. 동생에게는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가 없는 걸까? 그 진행자에게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흔들 권리가 있을까? 논쟁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
혹자는 버려진 딸이 원망을 내려놓고 친부모를 만나 부양하기를 바랄 수 있다. 이러한 바람은 부모 부양에 대한 사회적 체제가 결여되어 있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한 가지만 고려한 나머지 당사자의 감정은 살펴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량함의 정의와 개념에까지 주의를 기울였을 리 만무하다.
선량함으로 포장된 어리석음, 오류, 자학
선량함이란 높은 지혜를 이용해 선악과 시비를 명확하고 세밀하게 분석하는 능력이다. 일단 이에 대한 기초 지식을 습득하면 위장된 선량함과 허구의 선량함, 저능한 선량함을 구분할 수 있다.
위선이나 허구의 선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고의 예리함이 드러난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선량함의 가시’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먼저, 어리석음은 결코 착한 게 아니다.
둘째, 옳고 그름을 가릴 줄 모르는 것 또한 착한 게 아니다. 누군가 폭력을 당했을 때 가해자를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해자를 탓하는 경우이다. “왜 맞고만 있어?”라든지 “맞을 만했겠지.” 혹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맞은 사람도 자신을 돌아봐야 해.”라고 말하는 것 말이다. 이런 식의 지적은 우리 사회의 공정함에 결함을 남기는 행위일 뿐이다.
셋째, 자학 역시 절대 착한 것이 아니다. 가정 폭력으로 힘든 부인이 도움을 요청할 때, 위로해준답시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부부는 하루만 같이 살아도 만리장성을 쌓고 백일을 같이 살면 바다처럼 깊어진다잖아. 잘 생각해봐. 좋은 점도 많잖아.”
가시가 있는 선량함이란
옛사람들은 ‘지혜가 가장 큰 선’이라고 하였고 왕양명은 ‘치량지(致良知)’라고 하였다. 즉 선량함은 지혜의 본모습이라는 뜻이다. 선량함이 없는 총명함은 교활함에 불과하고 총명함을 잃은 선량함은 우매함과 같다. 진정한 선량함은 사람들이 타인을 대할 때 드러나는 각기 다른 감정, 온화한 태도, 마음의 평정, 위로의 말 한마디, 친절한 눈빛 등에서 경험할 수 있다. 어떤 순간에도 타인을 대할 때는 신뢰와 배려를 잃지 않고,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드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총명함을 뽐낼 수 있음은 물론 선량함의 가치와 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
이 포스트는 『그럼에도 사는 게 쉽지 않을 때』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