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사는 위계 조직일까 역할 조직일까
우리 회사는 위계 조직일까 역할 조직일까
위아래는 있으나 모두 동등하다?
실리콘밸리 회사에도 ‘위아래’가 있다. 엔지니어인 나는 엔지니어링 매니저에게 리포트report를 한다. 보고서를 공들여 작성해 제출한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뭘 했는지 앞으로 뭘 할지 알리고, 언제 휴가를 쓸 것인지, 언제 아기를 낳고 육아휴직을 할지 이야기한다. 그러면 매니저는 그 일과 휴가가 다른 사람들의 일과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피드백을 준다. 내 엔지니어링 매니저는 디렉터에게 리포트를 한다. 디렉터는 바이스프레지던트(부사장, 부회장)에게 리포트를 한다. 상하 관계가 분명하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는 수직적인 상하 관계가 없다고들 한다. 모두가 동등하고 평등하다고 한다. 나 또한 그렇게 느낀다.
회사의 누구도 나에게 ‘갑질’을 하지 않는다. 내 출퇴근 시간에 대해 눈치주지 않고, 심지어 내 성과에 대해서도 눈치 주지 않는다.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나는 매해 1월과 7월에 지난 반년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 쓰고, 나와 함께 일한 동료들과 매니저는 내 레벨에 비추어 내가 어떠한 성과를 거두었는지를 절대평가한다. 내가 내 레벨보다 더 많은 성과를 냈으면 승진할 것이고, 레벨에 맞는 성과를 냈으면 그 레벨에 머물 것이고, 레벨보다 못한 성과를 냈으면 내 레벨을 낮추거나(이런 일은 거의 없다.) 잘릴 것이다.(차라리 이렇게 된다.)
한국 기업과 다른 점은, 10년간 같은 레벨에 머물러 있다고 해서 한심한 사람으로 취급받거나 퇴직하라는 눈치를 받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연봉은 최소한으로 오를 테고, 자신보다 늦게 입사한 사람들이 더 빨리 승진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주의가 기본인 이곳에서는 나중에 시작한 사람들보다 뒤처져도 별로 상관하지 않는다.
위계 조직과 역할 조직의 결정적 차이
의사 결정 권한은 회사에서 가장 중요한 권력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이 가져야 한다.
상하 관계를 중시하는 회사에서는 ‘우리’의 과장님, 부장님, 팀장님, 사장님이 의사 결정을 한다. 엔지니어는 의견을 낼 수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윗사람’의 절대적 권한이다. 그래서 덜 권위적인 윗사람은 아랫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하면서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 스티브 잡스처럼 식견이 뛰어난 사람은 혼자서 그린 비전을 향해 전 조직이 달려가게 만든다. 애플과 전통적인 미국 기업들, 그리고 삼성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들이 선택한 기업 모델로, 이를 ‘위계 조직’Rank-driven organization이라고 하자.
위계 조직의 장점은 윗사람의 결정에 따라 최대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계 조직의 단점은 한 방향으로 달려가던 차의 방향을 바꿀 때 많은 마찰이 발생하는 것처럼 변화에 약하다는 것이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에어비앤비 등 비교적 최근에 생긴 실리콘밸리 기업들이 선택한 것은 ‘역할 조직’ Role-driven organization이다.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따라 책임감을 가지고 의사 결정을 하고, 업무를 수행한다. 최고경영자는 회사의 비전을 제시하고 전체를 경영한다. 엔지니어는 코드를 작성하며 시스템을 설계한다. 프로덕트 매니저는 자신이 맡은 프로덕트가 사용자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프로덕트를 개선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사 결정을 한다.
역할 조직의 장점은 모두에게 의사 결정권이 있기 때문에 민주적이고,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으며, 혁신하고 변화하는 데 용이하다는 것이다.
반면 권한과 책임이 분산된 만큼 크게 주의해야 할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각자가 추구하는 비전이 맞지 않으면 팀 간, 개인 간 분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그래서 이러한 회사에서는 핵심 가치Core value와 미션스테이트먼트Mission statement가 매우 중요하다. 둘째, 모든 구성원이 뛰어나야 한다. 직원 모두에게 결정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한 사람의 잘못된 결정으로 회사가 무너질 수도 있다.
그 회사에 ‘기획자’가 없는 이유는?
위계 조직에서는 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여 일을 시킨다. 그래서 한국 소프트웨어 회사에는 미국에는 없는 ‘기획자’가 있다. 모든 것을 설계하여 일을 시키기 위해서는 종합적으로 설계할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맞추어 엔지니어, 특히 외주 엔지니어들이 코드를 짠다. 이러한 방법은 기존 제품을 빨리 만드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자동차 공장이라면 문을 다는 라인에서는 설계도대로 차에 문을 다는 일만 잘하면 된다. 전체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는 별로 의미가 없다.
하지만 역할 조직에서는 개개인에게 프로젝트를 맡긴다. “이 설계도에 맞추어 나사 다섯 개로 문을 달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차에 문을 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라고 물어본다. 이렇게 개인의 창의력과 전문성에 기대어 문을 달도록 하면 엔지니어는 신기술을 활용하여 문을 더 잘 다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고, 그것이 그의 커리어가 될 것이다. 다른 여러 회사들이 혁신적으로 자동차에 문을 다는 그를 빼앗아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할 것이다.
이것이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몸값이 높은 이유다.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는 단순히 코드를 빨리 짜는 사람이 아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엔지니어, 디자이너, 프로덕트 매니저 등이 한자리에 모여 두장 짜리 기획서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개발자는 최신 기술을 적용해볼 수도 있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기획하고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기획하고 설계하기 때문에 전체 프로젝트와 회사의 미션 등을 잘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옳은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위계 조직에서 ‘좋은 말씀’ 정도로 여기는 미션과 핵심 가치, 비전을 역할 조직에서는 전 직원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물론 100% 위계 조직, 100% 역할 조직은 찾아보기 힘들다. 현실에서는 위계 조직적 요소가 많은 기업, 역할 조직적 요소가 많은 기업으로 나눌 수 있다.
애플 ―위계 조직의 좋은 예
대표적인 실리콘밸리 기업 중 하나인 애플은 위계 조직적 요소가 강하다. 엔지니어 간 협업이 제한적이고, 자신이 만드는 제품이 어디에 들어가는지 몰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만드는 물건이 명확한 제조업은 일사불란한 위계 조직이 더 맞는다. 그런데 애플은 혁신의 상징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위계 조직에서는 최고 결정권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애플은 운이 좋게도 스티브 잡스라는, 인류사에 손꼽히는 혁신가가 강력한 리더십으로 조직을 이끌었다. 최고 결정권자가 혁신적인 사람이면 혁신을 만들어내기가 훨씬 수월하다. 실제로 아이패드를 출시하기 전, 회사 안팎에서 실패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애플이 역할 조직이었다면 아이패드는 시장조사 끝에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스티브 잡스는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라고 선언한 다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아이패드를 시장에 내놓았고, 그것은 혁신적 성공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위계 조직의 최고 결정권자가 혁신적이지 못하면 그 회사는 혁신을 만들어내기 힘들다. 팀 쿡 체제에서의 애플이 세상을 놀랠 혁신적인 제품보다는 잡스가 만든 큰 틀 안에서 작은 혁신을 만들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구글 ―역할 조직의 좋은 예
구글은 실리콘밸리에서 거의 처음으로 역할 조직을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회사다. 에릭 슈미트는 『구글은 어떻게 일하는가』에서 구글이란 조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설명했다. 그는 구글 직원들을 “똑똑하고 창의적인 인재”라고 정의하고, 그들에게 최대한 자유를 주면 스스로 강한 동기를 가지고 최고의 혁신적 제품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가 주어진 구글의 똑똑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조직화하여 전 세계 사람들이 쉽게 쓰도록 하자.”라는 구글의 미션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수많은 혁신 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메일, 구글독스, 구글캘린더, 구글맵스, 자율주행차 웨이모 등 창의적인 제품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다.
동시에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장되었다. 강력한 중앙 조직 리더십 없이 각 개인에게 던지는 “당신은 어떻게 전문성을 살려서 창의적인 방법으로 기업 미션 달성에 기여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이 기업을 이끌다 보니,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미션에 기여하는 혁신은 회사의 모든 직원이 늘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구글의 이러한 방식을 페이스북, 트위터, 에어비앤비 등이 채용하여 실리콘밸리 혁신의 표준이 되었다.
우리의 프로젝트 vs. 나의 프로젝트
역할 조직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비용을 들여서라도 최고의 성과를 내는 인재를 뽑으려고 애쓰며, 또 그렇게 뽑은 인재에게 많은 연봉과 주식을 준다. 반면 위계 조직에서는 개인의 성과보다 팀 전체의 조화가 중요하기 때문에 개인에게 많은 대가를 지불할 동기가 약하다. “너 아니어도 일할 사람은 많아.”라는 말을 쉽게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또한 역할 조직에서는 매니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매니저는 내 생사여탈을 쥔 우리 과장님이 아니라, 나를 매니지먼트하는 경력 많은 동료 직원이다. 그러므로 매니저가 어떤 개인에게 눈치를 주고 갑질을 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너무 이상한 일이다. 윗사람이라는 의식도 없는데 윗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도 위계질서가 뚜렷한 기업에서 일한 적 있는 매니저들이 팀을 그렇게 이끌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위계 조직에서는 자신보다 조직을 우선하고 ‘우리’의 프로젝트를 위하여 일하면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다. 일을 정의하고 시키고 감시하는 사람 밑에서 주어진 일만 해야 한다면 당연히 주도적으로 일하기 어렵다. 만약 창의적으로 어떤 일을 하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냐?”며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역할 조직에서는 각자가 ‘자신’의 프로젝트를 위하여 일하며 다른 사람의 일에 상관없이 자기 일만 끝나면 퇴근할 수 있고 상하 관계도 의미가 없다. 물론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자신의 프로젝트를 더 뛰어나게 만들기 위하여 밤새 일에 매달릴 수도 있고, 가족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기 위하여 일은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하고 제시간에 퇴근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역할조직에서 매니저의 역할은 팀이 잘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최대한 발휘하여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회사의 미션에 기여하는 것이므로 자신의 커리어를 위하여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여 최고의 프로덕트를 만들어 내고자 할 것이다.
역할 조직이 혁신을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각자가 주어진 일에 갇히지 않고 전문성을 최대한 살려서 목표를 이루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혁신이 일상이 된다. _ Will (유호현)
이 포스트는 『실리콘밸리를 그리다 :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회사는 뭐가 다를까』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