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케도니아는 그리스에서도 변방 깡촌으로 취급되었습니다. 당시 마케도니아는 척박한 땅, 양치기들이 사는 나라였죠.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났을 때 마케도니아는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테베의 속국이었습니다. 흔히 정복왕이라 불리는 알렉산드로스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는 속국의 왕자로서 테베에서 볼모생활을 했습니다. 필리포스 2세는 강대해진 테베를 보고 벤치마킹을 결심했고, 고국으로 돌아오자마자 테베에서 배운 전술로 마케도니아 군대를 개혁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마침 마케도니아 땅에서 금광이 발견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마케도니아는 국가의 재정을 안정시킬 수 있었고, 군자금을 늘려 전력강화에 더욱 힘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전력강화와 함께 전술개혁도 단행했습니다. 기존의 팔랑크스 보병 대형에 변화를 준 것입니다. 병사 수를 줄이는 대신에 5.5미터나 되는 긴 창을 휴대케 해 적의 방패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이었죠. 마케도니아는 이를 위해 병사들에게 고강도 체력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정사각형 모양으로 포진한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팔랑크스 대형은 정면 공격에는 강했지만 측면 공격에 취약하고 방향 전환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고, 이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마케도니아는 기병 수를 늘리는 조치를 취합니다. 이른바 ‘헤타이로이’라고 불리는 최정예 기병을 구성했는데, 헤타이로이란 ‘왕의 친구들, 동지들’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말은 각자 자기 돈으로 마련하는 것이어서 헤타이로이는 대부분 중산층 이상의 시민이나 귀족계급이었죠. 한마디로, 가진 자만이 말을 탄 병사, 즉 기병이 될 수 있었습니다. 헤타이로이의 구성원은 왕의 친척이나 특별히 충성심이 강한 자들이었습니다. 일종의 왕의 친위대 격이었죠.
이렇듯 필리포스 2세는 강력한 마케도니아 군대의 근간을 만들었습니다. 막강한 전력을 가지게 된 필리포스 2세의 꿈은 그리스 전체의 통일이었죠. 그리고 일련의 전투와 외교적 책략으로 그리스의 전통적 강자였던 아테네, 테베, 스파르타를 차례로 무너뜨렸습니다. 특히 필리포스 2세는 BC 338년에 벌어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아들 알렉산드로스를 데리고 갔는데, 아테네테베 연합군과의 이 일전에서 알렉산드로스는 2,000의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과감하게 적의 중앙군을 급습,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원정 당시 군제개혁으로 마케도니아의 기병은 기존 10분의 1에서 6분의 1까지 증강되었습니다. 사실상 마케도니아 기병은 전 그리스 최강의 부대였죠. 최정예 기병부대인 헤타이로이는 ‘사리사2.5미터 길이의 창’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기병에게는 제대로 된 안장이 나 안정되게 발을 걸칠 수 있는 등자가 없었기 때문에, 말 위에서 창으로 적을 찌를 경우 그 반동으로 말에서 떨어지기 일쑤였습니다. 따라서 헤타이로이는 찌르기 직전에 창을 손에서 놓는 고도의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인도 원정에서 헤타이로이는 결정적 순간에 돌격을 감행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죠.
기병의 부무장으로서는 외날 검인 ‘코피스’가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코피스는 기병, 보병 할 것 없이 사용하던 검이기도 했습니다. 코피스는 검의 날이 있는 바깥쪽으로 약간 휘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의 쿠크리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상대에게 훨씬 큰 부상을 입힐 수 있는 반면 사용법이 비교적 까다로운 편이죠.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었던 파라조니움이나 코피스는 후에 로마군의 상징인 글라디우스의 출현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의 원정군이 조직될 즈음, 그리스 전통의 팔랑크스 밀집 대형은 진화의 정점에 다다르게 됩니다. 팔랑크스를 이루는 보병들을 페제타이로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무려 5.5미터로 훌쩍 길어진 창 사리사를 사용했습니다. 기존 2.5미터 길이의 사리사는 이제 기병 전용 무기가 되었죠.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는 가로세로 16열의 정방형을 만들어서 진격했습니다. 팔랑크스를 이루는 보병들을 다섯 번째 줄 병사의 창이 가장 앞줄의 병사보다 조금 앞에 나오게 되어 있었죠. 마케도니아의 진화된 팔랑크스는 털을 곤두세운 고슴도치처럼 촘촘하게 창이 배열되었기 때문에 적진을 향해 탱크처럼 돌진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적은 접근하기 매우 어려운 포메이션이었죠. 어른이 팔을 뻗어 아이의 머리를 밀고 있으면, 아이는 아무리 주먹을 휘둘러도 어른을 때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케도니아 군대는 이 진화된 팔랑크스로 톡톡히 재미를 보습니다. 분명한 약점도 있었죠. 팔랑크스는 돌파력은 강력한 반면에 방향 전환이 매우 어려워 측면의 기병 공격에 취약했습니다. 특히 지형의 영향을 심하게 받았는데, 평지가 아닌 곳에서는 운용이 매우 곤란했죠. 이런 약점때문에 후에 로마군에게 패배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유럽 최초의 석궁인 ‘가스트라페테스Gastraphetes’를 사용했습니다. 당기는 힘장력을 이용한 무기는 활이 전부였던 당시에 이 무기는 대단히 혁신적이었죠. 가스트라페테스는 ‘U’자 모양 부분에 배를 대고 상체의 힘을 실은 상태에서 두 손으로 활시위를 당길 수 있기 때문에 종전의 활보다 훨씬 파괴력이 컸습니다. 특히 팔힘이 부족한 사람도 강력한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죠. 궁수의 인력 활용 폭을 대폭 넓힐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서양 최초의 대제국 마케도니아와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가 모두 석궁 타입의 무기가 주력이었던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전사를 연구하며 공성무기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정복전쟁을 떠나는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에서 수많은 공성전을 수행해야 했기에 다양한 공성무기를 개발하거나 차용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가스트라페테스를 대형화시킨 ‘옥시벨레스Oxybeles’였습니다. 동물의 힘줄이나 말꼬리 등을 밧줄처럼 만들고, 이것을 꼬았다가 풀릴 때 발생하는 에너지를 사용해 거대한 화살을 날리는 무기였죠. 옥시벨레스는 400미터 밖의 적 방패나 목재 방어벽을 관통하여 적을 살상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습니다.
투석기의 일종인 ‘오나거’도 있었습니다. 오나거 역시 토션 스프링 방식이었는데, 발사할 때마다 들썩거리는 움직임이 당나귀 같다고 하여 아시아 당나귀를 뜻하는 ‘오나거’가 이름이 되었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는 개량을 거듭하여 100킬로그램의 탄환을 약 600미터까지 날릴 수 있게 됩니다. 오나거는 이후 로마 제국에서도 사용됩니다.
공성전에서 성벽을 기어오르려면 사다리는 필수 품목입니다. 이동식 공성용 사다리 ‘삼부카’는 시소의 원리를 사용한 공성무기인데, 적군의 불화살로부터 병사들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병사들이 탑승하는 상자 반대편에 놓인 돌의 양으로 높이를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성무기의 끝판왕은 역시 공성탑 ‘헬레폴리스Helepolis’였죠. 티레섬 요새 공세 당시 위력을 발휘한 강력한 공성무기로 바퀴로 움직이는 여러 층의 전차 같은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나무로 된 외장에 가죽을 덧대어 불에 타는 것을 방지했고, 내부에는 각 층에 옥시벨레스와 같은 공성무기를 탑재해 집중 공격을 가할 수 있었죠. 헬레폴리스를 이용한 마지막 단계는 공성탑을 적 요새 가까이 접근시켜 구름다리를 설치한 후, 병사들이 요새 안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포스트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리터리 세계사 1. 고대편』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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