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에서 여자는 물레바늘spindle에 찔려 잠이 든다. 물레질spinning이 상징하는 바는 대개 운명의 실을 잣는 그리스 신화의 세 자매와 연관되어 운명과 우연히 만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더욱이 물레질이나 뜨개질은 전적으로 여성들의 일이었기에 여자로서 살아가는 운명을 말하기도 한다. 물레바늘에 찔려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여자가 되기 위해 무언가에 찔리고 다치는 운명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이다. 누군가는 물레바늘이 남근의 상징이라며, 물레바늘에 찔리는 것은 소녀가 남성에 의해 혹은 남성을 의식하고 자신의 여성성을 각성하는 과정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소녀가 남자를 이성으로 인식하면서 상처를 받는 과정은 그리 단순하게 가해나 피해로 볼 일은 아니다. 남자가 일방적인 가해자도 아닐뿐더러 여성이 그리 나약하지도 않다. 그보다는 물레바늘에 찔려 쓰러지는 것은, 아직 어리고 미숙한 여성이 미숙한 사랑으로 남성에게 다가갔다가 상처받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어릴 땐 진정성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아무리 서툴고 제멋대로여도 진심이면 다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랑에 빠지면 무지막지하게 질주하듯 상대에게 열광하며 달려갔다. 진심에 열광까지 넘치면 그 속도를 어쩌지 못해 걸려 넘어지던가, 상대가 차마 감당하지 못해 결국 상대를 들이받는 형국이 된다. 자신감이 부족하고 불안이 크니 외려 자신을 냅다 던지는 형국이었달까. 그리고 그렇게 달려가면 아니 다칠 수가 없다.
상처는 그렇게 입는다. 같은 방식으로 사랑의 실패를 몇 번 되풀이하다 보면 영혼이 텅 비어 마치 잠자는 것처럼 된다. 영혼은 깊은 내면의 크레바스로 빠져들어 간다. 자기 내부로 끝없이 파고 들어가 웅크린다.
상처는 달갑지 않다. 그러나 상처가 없이 안온하기만 하다면 또 성장이란 없다. 내가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질적인 변화가 있으려면 영혼은 이따금 잠을 청해야 한다. 오랜 잠을. 그래서 좀 오래 아픈 것도 필요하다.
영혼의 잠은 내면의 사막을 헤매는 일이기도 하고, 내면의 크레바스 밑바닥을 헤매는 일이기도 하다. 바닥까지 떨어져서 기어 다니다 보면, 내면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만나는 힘이 있다. 가장 원초적인 생명력, ‘살고 싶다’라는 강력한 힘이 심연의 밑바닥에서 뱀처럼 꾸물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게 가장 깊은 바닥을 쳤을 때 겪는 일이다. 그렇게 바닥에 닿으면 이제 올라올 일만 남은 상태가 된다. 이는 사막의 지표 깊숙한 곳에 숨은 강줄기를 찾아 터뜨리는 일이기도 하다.
언젠가 남편의 바람으로 힘든 일을 겪은 여인에게 차마 해줄 말이 없어 손을 잡고 물은 적이 있다.
“괜찮아요?”
내가 들어본 이혼 사연 중에 가장 가슴이 아팠다. 무엇보다 아이가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 엄마로서 분노를 터뜨리고도 남을(나 같았으면 상처를 준 아이의 아비를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그런 상처가 있었다. 의외로 그녀는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다.
“이젠 아무리 힘들어도 내가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괜찮아요.”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순진한 낭만주의자가 사랑을 찾다가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충만하지 못한 빈한한 자존감으로 더 갈급하게 찾았던 사랑을 잃어버리면, 한동안 까마득한 영혼의 심연 바닥을 기게 된다.
힘든가, 죽고 싶은가, 정말로?
그러나 살아 있다면 아직은 괜찮은 거다.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은 게 아니라, 괜찮지 않아도 괜찮을 수 있는, 그렇게 살아가는 시기가 있다. 그 시기를 거치며 스스로 변한다.
무엇보다도 ‘왜 나는 수동적이어서, 사랑을 못 받아서, 그리 사무쳤는가?’를 자문하게 되고, ‘사랑해줄 타인이 없어 나는 죽어야 하는가?’를 묻게 되고, ‘사랑 이외에 삶의 가치는 없는가?’를 또 묻게 된다. 그리고 점차 긴 시간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잘 살아내는 자신을 보면서 사랑해줄 사람, 그 대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이게 다 가능해지면, 내면의 성을 둘렀던 가시덤불에서 가시를 우수수 떨굴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초라한 자존감, 사랑받고 싶다는 절박함, 그러면서도 기민하도록 예민한 자의식으로 자신을 먼저 찔렀다는 걸 알게 된다. 남을 찌르는 가시는 모두 다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가 내 거죽을 먼저 찢고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을 깨달은 순간, 더 이상 아플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게 가시가 하나둘씩 사라진다.
공주가 깨어나면 온 공동체가 깨어난다. 이는 사랑이 두 사람만의 일이 아님을 의미한다. 크리스천 위먼은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 그 이상의 것을 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삶이 오로지 ‘사랑밖엔 난 몰라’로 끝나는 것은 아쉽게 느껴진다. 삶을 이루는 것이 남녀 둘이 주고받는 사랑밖에 없던가.
‘사랑은 둘이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텍쥐페리의 말도 이 지점에서 참으로 와닿는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손잡고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것이 사랑하며 사는 삶이고, 바로 여기에 사랑의 가치가 잘 드러나 있다. 마주보는 사랑이라는 건, 우주에 둘밖에 없는 사랑을 말한다. 한 사람으로도 그득 차는 우주는 황홀하기는 하다. 그러나 그렇게 둘이 서로 마주보느라 어디에도 가지 않고 다른 일도 하지 못하면, 그 세계는 정지되고 성장은 정체된다. 나는 이런 것이 사랑인 줄 알았기에 사랑에 실패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깊고 어두운 잠을 떨치고 일어나 새로운 존재가 된 사람의 사랑은 이젠 달라져야 한다. 둘이 함께 손잡고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사랑이라는 말은, 사랑하기에 두 사람은 둘을 넘어서 이 세상에서 함께 해야 할 몫이 있다는 뜻이라고 본다.
사랑은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지만, 죽어서 우리 뒤에 남는 건 그래도 사랑뿐이다.
이집트 신화에서 사람은 죽은 후 명계의 신 오시리스 앞에나아가고, 거기서 신은 영혼의 무게를 달아본다. 이 영혼의 무게가 충분해야 사후, 더 나은 우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이때 영혼의 무게는 우리가 살았을 때 사랑한 무게가 아닐까. 사랑받은 무게가 아니라 사랑한 무게로 영혼의 무게가 가늠되어 그다음에 어떤 우주로 갈 것인지 정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다음 우주의 이름이 천국이든 지옥이든 극락이든 말이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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