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에는 평행을 이루는 두 가지 침입이 일어난다. 하나는 마녀의 담을 넘어 들어가는 침입, 또 하나는 라푼젤의 탑에 올라 들어가는 침입이다. 남자의 침입에 분노하며 독설을 퍼붓고 저주하는 늙은 고델 부인과 아직 순수하고 무구하게 탑에 온전히 갇힌 라푼젤을 나란히 견주어 보게 된다.
그런데 늙은 고델 부인을 단순히 이 모든 사건의 가해자로 볼 수 있을까? 고델 부인은 왜 마녀가 되었을까, 왜 자기 정원에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높은 담을 둘렀을까? 왜 남자의 침입에 불같이 화를 낼까? 답은 단순하지 않다. 한 여성의 뒤틀린 삶이 다른 세대의 여성에게 대물림되는 순환의 고리가 보이기 때문이다.
남자를 믿으면 안 되고,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 안 된다고 역설하는 늙은 고델 부인이 젊어서는 남자에게 잔뜩 상처받은 또다른 라푼젤이며, 라푼젤이 남자에게 버림받고 늙으면 자신처럼 될 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 혹은 “난 엄마처럼 살지 않겠어”라는 말을 하는 엄마의 딸로 살지만, 우리 삶에 고델 부인과 라푼젤의 모습이 한 조각씩 다 존재하며, 이 조각들이 맞물려 순환하며 이어지는 것을 보면 슬퍼지기도 한다.
평생 자신을 내세우지 못하면서 남자의 집안에 희생하고 봉사하다가 늙어버린 엄마의 체념, 분노, 슬픔 등이 딸들을 ‘나처럼 살지 말라’며 세상으로 밀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힘은 동시에 남자에 대한 알 수 없는 분노로 바뀌어 높고 외진 탑에 스스로를 가둬버리기도 한다.
황야는 비어 있는 공간이다. 어쩌면 처절하게 자신과 만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오롯이 자신의 삶과 마주하고 텅 비어 있는 어둠의 바닥에서 자신을 건져올릴 힘을 기르면, 능히 황야를 그득 채우는 노래를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높이 솟은 탑에서 홀로 부르던 노래가 시선을 끌기 위한 노래였다면, 이젠 들어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도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된다. 그리고 눈이 멀어 세상을 헤매던 남자의 귀는 드디어 이 노래를 듣는다.
높은 곳에서 쉽게 퍼지던 그 운율이 아니라, 음향을 반사해 퍼뜨릴 것 하나 없는 평지에서 나지막하게 홀로 부르는 노래를 드디어 듣는다. 사람을 알아볼 줄 알게 된 것이다. 그런 운율을 들을 마음을 입었을 때, 노래하는 그녀를 만나 드디어 시력을 되찾고 왕자의 지위를 회복한다.
흔히 라푼젤의 눈물로 남자가 눈을 뜨는 것이 기적이라고들 하지만, 운 것은 여자만이 아닐 것이다. 이제 드디어 세상 끝까지 헤맨 끝에 내면의 눈이 생겨 참사랑을 알아보고 찾는 순간, 남자도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기적은 두 눈물이 섞였을 때 일어난 것이라 믿는다.
치유는 치유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일어난다. 존귀한 왕자라는 신분을 되찾는 것은 내면의 자존감을 다시 찾는 것을 뜻한다. 내면세계에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은 누구든 다 왕자이고 공주이니 말이다. 그득한 자존감으로 내면이 회복될 때에 사람은 비로소 사랑 안에서 흔들림 없이 상대를 붙잡고 새로운 세계,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로 살아가는 세계를 열 수 있다. 그렇게 ‘happily-ever-after(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의 세계가 열린다.
빛나는 황금 머리 타래를 모두 잃은 후, 세상의 변방인 황야로 쫓겨난 세월을 모두 견디고는 다시 서서히 자라난 황금 머리카락과 함께 세상의 중심으로 귀환한다. 어려운 시험을 거쳐 이룬 사랑은 결국 모든 것을 중심으로 돌려보내주는 힘이 된다. 그리고 많은 동화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나는 이유는 사랑이 모든 것을 중심으로 되돌리는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라푼젤은 힘들게 완성한 사랑의 힘을 통해 황금으로 빛나는 자존감의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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