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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늙은 년 하나만 달랑 남을 때

인문 교양 읽기/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by 스마트북스 2018. 6. 2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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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늙은 년 하나만 달랑 남을 때

좀 더 죄를 지어야 해요, 좀 더

우리는 좀 더 죄(?)를 지어야 해요, 좀 더.”
어느 언니가 한 말이다. 동감한다.
죄를 지을 몸이 있을 때 죄를 지어야 추하지 않고 늙어서도 비로소 아름답기 쉽다.
이 땅에서 너무 눌려 산 50대 여성들, 보수적으로 자란 일부 40대 여성들, 이제야 시대가 바뀌고 여자로서 몸이 변하는 위기를 겪으며, 그 오랜 세월 억눌리고 뒤틀렸던 욕망들이 흉하게 터져나온다. 완경이 되면서야 비로소 단 한 번도 제대로 여자로서 사랑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으며 처절해지는 거다.
더구나 한때 삶의 많은 의미였던 자녀들이 커서 떠나가 버리고, 남편은 그저 가족일 뿐인 빈 둥지에 덩그러니 남아 정신적 육체적 위기를 홀로 겪는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줄 다른 가치들인 일 혹은 사회적 성취감도 없다.
정말 삶에 늙은 년 하나만 달랑 남는다.
위기를 맞아 눌려왔던 게 터진다. 더 이상 남자들이 여자로 봐줄 나이도 아닌데 여성성을 확인받으려고 한다. 하지만 잘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때로는 백설공주의 계모 같은 질투와 공포로 일그러진다.
에너지는 많으나 자신의 욕망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도록 정신에 족쇄가 채워진 여자들은 이렇게 늙는다    

거울은 가부장 권력의 화신 

백설공주를 읽다 보면 드는 의문이 있다. 대체 아버지인 왕은 어디에 있는가. 계모와 결혼해 왕비라는 권력을 부여한 주체는 대체 어디에 있길래 내내 등장하지 않는가.
사실 남성성은 백설공주에서 네 가지 형태로 등장한다.
하나는 여성의 가치를 미모로 환원시키는 남성의 권력인 왕이자 거울, 여성의 가사노동과 성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계를 제공하는 일상의 왜소한 남성들인 일곱 난쟁이, 여성을 사냥감game으로 삼는 사냥꾼 hunter, 그리고 로맨스의 현현인 왕자prince.
여성의 가치를 미모로 환원해 전락시키는 가부장 권력이 동화에서 거울의 형태로 구현된다. 계모 왕비가 왜 허구한 날 거울 앞에 서서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냐고 묻겠나. 그것은 남자 앞에서 미모를 확인하고 자신의 가치를 공고히 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남자가 예쁘다고 인정해야만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가지며, 남자가 주는 권력을 받아 그 기반을 공고히 하는 여성이 바로 계모 왕비이다.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싶다가도

백설공주 이야기가 채록된 실제 구전에서는 계모가 아니라 친모로 등장한다는 점이 더 의미심장하다. 자신의 가치를 남자에게 확인받아야 하는 빈약한 자존감을 가진 여성이 남성이 주는 권력에 목을 매면 딸조차 그저 경쟁자일 뿐이다. 자매애sisterhood나 모성motherhood 등은 이런 여성들 앞에서는 무의미하다. 이런 여성들과 섞여서 살다 보면 세상의 자매애는 몽땅 부정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남자에게 매력 있다고 인정받지 않으면 자신의 가치를 찾을 수 없는 절박한 인생이다. 특히, 평생 이 가부장 사회에서 억눌려오다가 나이 오십 즈음에 폐경기에 이르면, 이제 여자로서의 인생이 끝난다는 위기의식에 사로잡힌다. 어쩔 줄 모르는 몇몇 여성들은 남자에게 육체적 매력을 인정받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하며 끔찍해 하다가도, 남자 외에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을 다른 것이 없는 삶, 하는 일도 없고 자녀들도 독립한 상태에서 오로지 매달릴 게 남자밖에 없는 언니들을 보면 딱해서 차마 까발리지를 못하겠다. 더 이상 외모가 매력이 되지 못하는 나이이다. 왜 그걸 모르나. 그때까지 쌓아둔 다른 가치, 다른 매력, 다른 몰입의 대상이 없다면 참으로 비참해진다. 저 거울, 그러니까 남자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는 행위의 문제점을 왜 성찰하지 못하고 극복하려 들지 않는가    

너만 고고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아?

계모의 질투는 단순하지 않다. 계모에겐 절대 질투 수준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가치와 권력의 기반에 도전하는 백설의 미모를 묵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계모는 백설을 숲속으로 내쫓는다. 계모 왕비는 사냥꾼에게 백설을 숲으로 데려가 죽여 그 고기를 가져오라고 한다.
너만 고고하게 남자의 시선에 초연한 척할래?’ ‘감히 순수할래?’ ‘어디 너도 고깃덩어리라는 걸 확인해봐라며 등 떠미는 행위와 다름없다.
백설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대로 순수한, 때 묻지 않은 여성 자아이다. 그녀가 숲속으로 가게 되는 것은 사냥감, 그리고 고깃감으로 삼겠다는 남성에 이끌리거나 쫓겨서이다. 소녀가 되어 여성성이 발현되고 남성이 이성으로 보이는 순간, 여성을 외모로 판단하는 기성 사회와 그 속에 계모의 모습으로 갇힌 선배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
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순진함은 시험을 받는다. ‘너는 사냥감이고 고깃감이니 도망치거라, 아니면 잡아먹혀라.’
고깃감으로 전락하기 싫은 백설은 도망친다. 깊은 숲속으로.
그러나 혼자 먹고살 능력이 보장되지 않은 채,
남자들의 사회에서 여성은 그저 남성에 기대어 생계를 유지하는 더부살이 인생으로 전락한다. 도널드 바셀미는 스노우 화이트에서 백설을 낮에는 가사를, 밤에는 섹스를 제공하고 생계를 제공받는 전업주부의 모습으로 그렸다. 그리고 여자를 그저 낮 시중과 밤 시중을 드는 효용 가치가 있는 존재로 보는 남자들은 왜소한 난쟁이들이다.
여자로 완성된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미모에 의해 존재가치가 매겨져서 늘 남자의 시선이라는 거울 앞에 서는 대상, 고깃감으로 쫓기는 대상? 그리고 좁은 우리에 가두어져 한 남자에게 한정된 노동을 제공하고 생계를 보장받는 더부살이? 이 주입된 가치관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남자야, 이제 날 사랑하거라

백설은 독사과를 먹고 죽는다. 미모가 존재가치의 최고라 설파하는 여성관이 내어주는 독사과를 먹고 기어코 죽는다. 죽었다가 그 독사과를 내뱉을 때 비로소 진정한 파트너를 만난다. 죽은 존재여도 상관없다며 부둥켜 안아주는 대상을 비로소 만난다. 부서졌고 다쳤으며 모질게 부림을 당해 더 이상 남은 게 없으니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지만, 투명한 유리를 꿰뚫어 보듯 백설의 실체를 보아주는 사람을 드디어 만난다.
여성은 그렇게 지난한 고통 끝에 사회가 강요한 여성상을 철저히 부인해 죽이고서야, 비로소 사랑하고 사랑받는 귀하디귀 한 존재로 부활한다. 그제야 말한다.
남자야, 나를 사랑하거라. 난 죽었다 살아났느니 네가 함부로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자체로 난 소중하고 아름다우니, 남자야 이제 날 사랑하거라.”
눈이 세상을 하얗게 덮어 감싸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희고 아름답게 보이게 해주는 더러움이 있어야 하지 말이다. 그래서
가끔 널 만나 아름답기 위하여 내가 이렇게 때 묻었으니, 퉤퉤!’ 하고 싶을 때도 있다
백설공주 | Snow White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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