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두 달이 넘었건만, 내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바닷가에 가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행여 그의 소지품 하나라도 파도에 밀려오지 않을까. 차갑게 식은 그의 몸은 다시 찾을 수 없을 테지만, 그가 몸에 지녔던 물건 한 조각이라도 행여 바닷가로 밀려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나는 바닷가를 매일 아침 걷고 또 걸었다.
유모는 어차피 이루어지지 못할 사이였지 않냐고 한마디 던졌다. 그 말에 나는 비로소 삭였던 모든 슬픔을 터뜨리며 두 달 만에 울었다. 내 남자가 되지 못해도 괜찮았다. 같은 하늘 아래행복하게 살아 있기만 하다면, 이리도 내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지는 않았을 텐데.
들키는 게 아니었다. 티를 내지 않고 못 본 체하고 볼을 붉히지 않았더라면, 어머니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고,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내가 하찮은 기사의 종자 따위에게 마음을 준다고 속닥이지도 않았을 거고, 아버지가 그를 멀리 바다 건너 왕국의 사절단에 넣지도 않았을 거고, 그러면 사절단이 탄 배가 폭풍우에 휘말려 빠져죽지도 않았을 텐데. 그랬을 텐데. 수많은 ‘…텐데’, ‘…텐데’를 되뇌며 하염없이 잠도 못 자고 미친 사람처럼 걸었다.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영혼은 하늘로 가지 못한다고 한다. 그의 몸, 영혼 모두가 심해 어딘가의 해초에 갇혀 하늘거릴 것만 같았다.
바닷속에서는 인어들이 물에 빠진 이들의 영혼을 모아 상앗빛 상자 안에 가두어둔다고 한다. 밤에 창가에서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를 보자니, 그의 영혼은 이제 바닷속 깊이 갇혔으니 나는 죽어 영혼이 되어서도 그를 만나지 못하겠구나 싶었다. 나도 물에 빠져 죽을까? 그러면 내 영혼은 바닷속 깊은 곳에서 그의 영혼을 만날 수 있을까?
전날 밤 폭풍우가 또 거세게 몰아쳤다. 밤새 잠을 자지 못했다. 그가 탄 배가 가라앉던 그날이 다시 찾아온 듯했다. 날이 밝고 바다가 잠잠해지자 바닷가로 달려 나갔다. 해변 저 멀리에서 사람이 쓰러진 걸 봤을 때 미친년처럼 달려갔다. 그 사람 옆에서 무엇이 혹은 누군가 미끄러지듯 사라지는 것을 본 것 같기도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바닷가에 밀려온 저 몸뚱이를 확인해야 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값진 옷을 입은 젊은 남자였다. 뒤집어 얼굴을 보니, 남자가 눈을 뜨고 눈부신 듯 나를 보더니 “아, 살았구나. 당신이 나를 구한 거요?”라고 물었다. 아아……, 이런 남자는 잘도 폭풍우에서 살아 돌아오건만.
내가 구해준 남자는 하필이면 이웃나라의 왕자라고 했다. 그 나라 신하들이 득달같이 달려와 왕자를 싣고 갔다. 고맙다고 연신 허리를 굽혔다. 정신을 반쯤 놓은 것 같은 나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찔러댔다. “남쪽의 늙은 왕은 안돼요. 아무리 그게 나라에 이익이 크다 해도 말입니다. 딸아이 생각을 해요. 젊은 왕자가 더 낫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언짢아했다. 그래, 남쪽의 늙은 왕에게 팔려가면 우리 배들이 통행세를 내지 않아도 되니 참으로 나라에 보탬이 될 텐데 말이다. 북쪽 작은 나라의 왕자 따위에게 팔아보았자, 해달 가죽과 암염이나 들어올 거라고 아버지는 툴툴거렸다.
상관없었다. 누구에게 팔리건.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져가는 나를 보며 선심이라도 쓰듯이, 북쪽 나라의 젊은 왕자에게서 혼담이 들어왔으니 결혼하라고 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결혼식 피로연은 배 위에서 열렸다. 아버지가 결혼 선물로 보낸, 그의 나라엔 없는 크고 튼튼한 배였다. 그 배 위 장막 안에서 초야를 치르게 되어 있었다. 공주와 공녀들의 초야란, 하얀 침대보에 빨간 핏자국을 묻혀서 장막 밖에서 기다리는 이들에게 이 상품이 무결하다는 걸 보여주는 의식일 뿐이었다.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진 나에게 그깟 살점을 헤집어 피 몇 방울 흘린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싶었다.
술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와 말소리가 그대로 다 들리는 장막 안, 끙끙거리며 내 몸을 헤집던 왕자가 몸을 일으켜 옷을 추스르더니 피 묻은 침대보를 들고 나가 치켜들었다.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왕자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시녀가 들어와 내 몸을 다시 씻겨주고 잠자리 옷을 입혀주었다. 새로 간 하얀 침대보에 욱신거리는 몸을 눕히고 얼굴을 묻었을 때, 이제 한 방울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은 눈물이 터져나왔다. 그러다 잠들었나 보다. 고주망태가 된 왕자가 비척이며 들어와 입고 있던 옷 그대로 풀썩 쓰러져 옆에 누울 때 놀라 잠에서 깨었다.
장막 밖도 조용해져 있었다. 다들 곯아떨어진 듯했다. 이대로 나가 뱃전으로 몸을 던질까 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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