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왜 나쁜 남자만 만나요? 왜 그런 남자하고만 사랑에빠지는데요? 똑똑해 보이는데, 나쁜 놈인 줄 몰라요?”
나는 잠시 멍했다가 대답했다.
“내가 푸른 수염의 딸이라서요.”
남자는 이해하지 못했다.
푸른 수염은 어쩌면 폭압적인 가부장을 상징하는 동화 속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는 최소한 살인이라 규정되는 몸뚱어리를 죽이지는 않는다. 여자의 정신, 혹은 그 영혼이 죽을 뿐이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왜 영혼이 죽도록 힘들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로맨스에 기만당했다고 말하겠다.
유독 눈에 띄는 푸른 수염의 남자처럼 현실의 남자는 무언가 걸리는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기로 작정한 여자는 이 거슬리는 구석이 내가 사랑하는 남자의 열 가지 부분 중 한 가지일 뿐이라고 애써 치부하고 만다. 좋은 부분이 아홉가지이니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고 넘어가자고 작정해버리는 것이다.
동화에서는 이게 푸른 수염의 성에 방마다 가득 들어찬 금은보화와 멋진 가구, 연일 벌어지는 파티들로 묘사된다.
열 가지 중에 아홉이 좋고 하나가 거슬리지만, 그 하나를 애써 무시하던 사랑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하나가 견딜 수 없어지고 결국 남은 아홉 가지를 다 팽개치고 싶은 패착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수많은 열쇠 중 금기시되었던 단 하나의 열쇠가 된다. ‘열지 마, 절대 열면 안 돼.’ 사랑이 변해가면서 거슬리던 하나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다가 결국, 현실에 눈을 뜨게 된다.
달콤한 로맨스, 열광적인 구애를 거쳐 결혼하고 안착하면, 혹은 장기적인 연애로 접어들면, 이제 애써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어두운 구석의 작은 방에 갇혀서 여자를 부른다. 처음에는 커다란 성 전체에서 아주 작은 방 하나일 뿐이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성 전체를 다 전복할 만한 무시무시한 비밀을 안고 속삭여온다.
그 문을 열면 관계가 끝난다는 것을 잘 알지만, 내면에서 아우성치는 거슬리는 소리에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한다. 그래서 여자는 기필코 작은 방의 문을 연다.
푸른 수염의 딸로 자란다는 것은 무엇일까. 부정적인 아버지 상을 새기고 자란 여성은 “난 절대 아버지 같은 남자와 결혼하지 않겠어!”라고 극렬하게 부정하며, 아버지와 비슷한 속성을 지녔다고 생각되는 남자들을 모두 거절한다. 그렇게 세상 끝까지 도망치는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는 딸이 자라 남자 앞에 서게 될 때 그 이성상을 구축해주는 근원적인 존재이다. 문제는 푸른 수염의 딸로 자라서 ‘푸른 수염 같은 남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말아야지’ 하고 세상 끝까지 도망가서 찾은, 애써 끌리는 남자가 어느 순간 보면 푸른 수염과 꼭 같은 면을 보이는 악순환의 고리를 돌게 되는 데에 있다. “왜 나쁜 남자만 만나요?”에 대한 나의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은 온전하게 충만한 ㅁ이 되게끔 키워져야 한다. 그런데 부정적인 부모 밑에서 치우친 ㄱ자 사랑을 받고 자라면, 아이는 그것을 받아내느라 마음이 ㄴ자가 되어버린다. 마음이 ㄴ자이기에 온전치 않아서 결핍도 훨씬 많이 느끼고 사랑받고자 하는 갈망도 더 크다.
그런데 마음 틀이 ㄴ자로 자랐으니, 마음 틀이 ㄱ자로 맞물리는 남자에게만 끌린다. 그의 ㄱ과 나의 ㄴ이 딱 맞아 떨어지며 아귀가 맞아버리고 만다. 무의식의 요철이 딱 맞아 떨어진달까. 그래서 세상 끝까지 가서 찾고 또 찾아도, 결국 ㄱ자 마음 꼴을 가진 남자만 만나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지인 중에 한 여성은 아내를 때리는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다. 자라서 목사와 결혼했는데 손찌검이 심해서 이혼을했다. 그리고 혼자 외롭게 오랜 세월을 살다가, 마침내 만난 또 다른 남자와 사랑하느니 하며 제법 알콩달콩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남자의 손찌검에 눈두덩이가 시퍼렇게 멍들고 입술이 터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여자는 때리는 아버지가 싫어 도망치고(미국으로 이민 갔다), 거기서 만난 남자에게 맞아 이혼하고, 그 남자를 피해 돌아온 한국에서도 자신을 때리는 남자를 만나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서 ‘마음이 ㄴ자이구나, 저 마음의 틀을 바꾸지 못해서 마음이 ㄱ자로 치우친 남자들만 거듭 만나는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마음이 ㄴ자인 사람은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는, 누군가 주는 사랑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여자라고 체념하고, 영원히 ㄴ자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걸까?
푸른 수염의 딸들은 그렇게 울며 세상을 떠돈다. 몇몇은 푸른 수염에게서 달아나지 못한다. 몇몇은 무서워서 평생 작은 방의 문도 한번 열어보지 못하고, 본인도 모르는 상처가 이유 없는 감정의 발작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겪으며 산다. 그리고 아주 소수가 작은 방 문을 열어보고 푸른 수염을 죽인 후 당당히 홀로 서서 ㄴ자 마음을 비로소 ㅁ자로 고치고 환하게 웃는다.
어떻게 마음의 꼴을 바꾸는지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동화와 옛이야기에 숨겨놓은 비밀에서 알아낼 수 있다. 개인에게는 고유하고 독특한 삶이지만, 여자라서 흔히 겪는 삶을 먼저 겪은 그녀들이 큰소리로 말하지 못한 비밀들을 그 속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동화는 그래서 읽는다. 자신의 상처를 비로소 인지하고 치유하고 마음의 꼴을 바꾸고 새로운 마음을 입고 환하게 웃기 위해서.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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