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닮아 예쁜 딸, 왕의 아들 눈에 예쁜 딸은 결국 남자들이 보기에 좋은 모양과 그들이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여자를 나타낸다. 이런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그것을 듣는 어린 소녀의 영혼에 남기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남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혼자 늙어 죽는다.’ 참으로 두려운 메시지가 아닌가. 「다이아몬드와 두꺼비들」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원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쫓겨나 그 구석에서 아무도 모르게 죽을 거라는 메시지를 남기는 동화다. 이 동화에서 착한 작은 딸이 말할 때는 꽃과 보석이 튀어나오고, 못된 큰딸이 말할 때는 두꺼비와 뱀이 튀어나온다. 즉, 꽃 같은 말을 하는 여자와 두꺼비와 뱀 같은 말을 하는 여자가 나온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전해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야 할까?
학부 때 남자 선배 중에는 대놓고 내게 그렇게 말하는 이가 있었다.
“여자는 똑똑하기보다는 지혜로워야 해.”
“지혜로운 게 뭔데요?”
“말해야 할 때와 안 해야 할 때를 구분하고, 아는 것도 안다고 하지 않는 거지!”
기가 막혀서 선배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던 기억이 있다.
선배가 모르는 걸 안다고 덥석 말한 게 죄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천성이 호기심이 강해서 더 알고 싶은 주제가 나오면 가슴이 뛰는지라 기어코 그걸 말로 하는 사람인데 타고난 본성을 부인당하는 느낌이었다. 더 많은 것을 묻고 배우기 위해 대학에 들어왔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딜레마는 여기에서부터 빚어졌다. ‘여자에게 로맨스와 지성은 왜 양립 불가능한 것이어야 하는가?’
시스젠더 헤테로섹슈얼cisgender heterosexual(이성애자로 타고난 성적 지향)인 여자로 살면서, 삶의 한 부분은 학업과 일로 채워졌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관계였다. 그러나 이 땅의 잠재적 파트너인 남자 사람들 다수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여자는 똑똑하면 사랑스럽지 않아.”
마치 알고 싶고, 배우고 싶고, 논하고 싶다는 여자는 입에서 두꺼비라도 내뱉고 있는 것처럼.
너희 귀에 꽃처럼 예쁘고 보석처럼 귀한 말이란, 들은 대로 순종하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춤추라면 추고, 노래하라면 하고, 설거지하라면 설거지를 하는 존재이던가 싶었다. 전통적으로 여자의 역할이라고 정해진 궤도에서 벗어난 성정을 가지고 태어난 여자, 사람, 개인은 삶에서 중요한 관계는 포기하고 완성되지 못하는 삶을 감수해야 함을 뜻했다. ‘왜 이 사회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타고난 개인의 성정을 꺾으려 드는 걸까?’ 이런 의문이 들기 시작하면 ‘이제 삐뚤어지겠다!’ 하는 마음이 자리를 잡고는 했다.
혀에 가시가 돋치는 건 그때부터였다. 영어로는 ‘sharp tongue 날카로운 혀’를 가졌다고 한다. 그렇게 날카로운 혀로 학부시절을 보냈다. ‘꽃 같은 말을 내뱉는 여자는 되지 않겠노라’ 결심했다.
“난 당신을 소금만큼 사랑합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에서 코델리아가 아버지에게 한 말이다. 이보다 더 진실한 사랑의 고백이 어디 있는가. 하지만 아버지는 딸에게 소금 자루를 지워서 광야로 쫓아낸다. 그러나 끝까지 아버지에 대한 애정에 충실했던 건 소금 같은 말밖에 못하는 딸이었다. 꽃 같은 말, 보석 같은 말을 해대는 두 딸은 아버지에게서 얻어낼 것을 다 받아내고는 이내 유기한다.
보기 좋은 얼굴만 보이고 듣기 좋은 말만 하라고 강요하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는 두 가지 삶의 양식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하나는 그네들이 원하는 모습에 나를 맞추어주고 원하는 것을 얻으며 이용하는 것, 또 하나는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보이며 탄압을 받고 고통을 받을지라도 자신 내부의 자기 통합성integrity을 지키며 사는 것.
얼핏 보기에는 전자의 삶이 참으로 그럴싸해 보인다. 그게 똑똑한 짓이 아닌가도 싶다. 그러나 「리어 왕」에서 나중에 첫째 딸과 둘째 딸이 서로 반목하며 한쪽을 죽이고, 살아남은 쪽도 남편에게 배반당하는 결말을 생각해보라. 여성 억압이 심한 사회에서는 여성들끼리 반목하는 정도가 더 심하다. 자신의 성정을 내보이지 못하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습만 보이도록 억눌린 여자들은 속이 뒤틀리는지, 일단은 자기들끼리도 잘 싸우고, 더 나아가 자신의 일부만 받아들이는 상대를 신뢰하지도 신뢰받지도 못하게 된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내면이 분열된 사람이 외부와는 화해하겠는가. 가식과 위선과 거짓의 틀에 갇힌 이들은 그 틀 안에서 삶을 마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코델리아의 삶이 더 나은 거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물론 그녀 역시 비극적으로 삶을 마쳤다. 아버지를 구하려고 군대와 함께 돌아왔다가 옥에 갇혀 죽고 말았으니. 그러나 코델리아는 최소한 세 가지는 얻었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과 결혼했고,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던 아버지와 화해하고 용서했으며, 무엇보다도 안팎이 같은 자기 일관성을 붙들고 죽었다.
삶이 난폭하고 세상이 어지러운 게 현실인지라, 선한 이들이 승리하는 결말은 픽션에서나 찾아볼 일이다. 현실에서 우리는 하나의 개인으로 혼자 세상과 마주한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가치는, 그저 내가 마주한 세상 앞에서 직접 일구어, 스스로 끄덕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죽음이 고스란히 개인의 몫이라면, 세상과 마주하는 개인이 ‘내 삶이 의미가 있었노라’고 수긍할 수 있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쯤 되면 ‘세상이 꽃 같다’ 하는 말, ‘세상이 뱀 같다’ 하는 말이 이쯤 되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내 본성이 꽃이어서 꽃 같은 말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뱀 같은 말도 할 줄 아는 이가 비로소 꽃 같은 말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게 진실이다. 불의를 보고 분노로 뱀같은 말을 할 줄 아는 이가 분노와 고통과 슬픔의 길을 걸으며, 얼음은 녹이고, 가시는 떨어뜨리고, 슬픔은 증발시킨다. 그리고 비로소 꽃이 피는 땅에 이르러 꽃 같은 말도 할 수 있게 되는 게, 사람이 살아가며 성장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꽃 같은 말만 하라고 하지 마라. 뱀 같은 말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헤집어야 비로소 꽃 같은 말의 가능성도 껴안을 수 있다.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느라 꾸며대는 꽃 같은 말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와 피어나는 꽃 같은 말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의 의미는 다른 시대에 사는 우리가 새롭게 해석해서 우리의 말로 만드는 것이라 믿는다. 이제 우리에게는 ‘남자들이 보기에 좋은 모습만 보이고, 듣기에 좋은 말만 하는 존재로 살지 않겠노라’고 외칠 수 있는 언어가 있다. 우리는 두 가지 모습을 다 가진 존재이다. 꽃 같든 뱀 같든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우리 선택에 의해, 우리 필요에 의해 어느 쪽의 말이든 할 것이다. 이제 대를 거듭해 속삭이며 전해온 이런 동화 속 뻔한 이야기에서 벗어나자. 이제는 어머니가 딸에게 전해주던 두려움을 극복할 때이고, 아버지가 딸에게 투사하던 가치를 거부할 때이다. 그리고 남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 본다.
‘꽃과 뱀을 다 품은 여자를 받아들이든가, 그걸 못 하겠으면 가라.’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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