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규제는 기업 활동과 경제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경제에 도움이 되는 규제도 분명히 있습니다. 규제는 국가경제라는 거시적 측면뿐만 아니라 기업의 성장이라는 미시적 측면에서도 적지 않은 역할을 합니다. 규제를 방해물로 여기지 않고, 기회로 살린 일본 소부장(소재 부품 장비) 기업의 사례를 소개합니다.
호리바제작소의 창업자는 교토대학 원자핵물리학 연구자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일본의 핵물리학 연구가 중단되면서 대학을 떠난 그는 1956년 교토에서 호리바무선연구소를 창업해 콘덴서 개발에 사용하는 PH산도 측정장비를 만들고, 산도 측정기술을 응용하여 환자들의 호흡측정 장치를 만들면서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호리바가 크게 성장한 것은 환경규제 덕분입니다. 1970년대, 미국은 대기정화법을 제정하고 자동차 배출가스를 단속하기 시작했는데 호리바는 호흡 측정장비를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장비로 사용하는 발상으로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장비 시장에 일찌감치 진입했습니다. 호리바는 성장을 거듭해 자동차 배기가스 측정기 세계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종업원 5천여 명 규모의 글로벌 기업이 되었습니다.
현재 호리바는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기차, 자율주행차 등이 등장할 미래에는 자동차배기가스 측정시장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미래차 시대에 대비해 호리바는 4.5㎞의 미래차 전용 테스트 코스를 건설하고, 전파암실을 보유한 영국 MIRA 사를 인수하는 등 새로운 자동차 규제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1945년 사가현에 창업한 니시무라철공소는 콤팩트디스크 건조기 세계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기업입니다. 회사명에서 알 수 있듯, 작은 철공소였던 니시무라가 건조기 시장에 진입한 계기는 우연한 만남 덕분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하는 제조업체 사장들을 초청한 사가현 주최 교류회에 참가했던 니사무라는 한 양조장 사장이 정부 규제로 소주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를 더 이상 바다에 버릴 수 없어 고민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폐수 처리장비를 만들어볼까?’ 하고 생각한 니시무라는 인근 대학의 도움을 받아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기존 폐수 처리장비는 원통 드럼에 폐수를 넣고 증발시키는 방식으로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것이 단점이었는데 니시무라는 콤팩트디스크라는 부품을 사용해서 에너지 효율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주조장에서는 주문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자동차, 반도체 등 다른 업종에서 공업용 폐수처리 장비로 사용합니다. 지금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독일, 중국, 한국 등 해외로 판로를 넓히고 있습니다.
독일과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중에 서로 기술교류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독일은 여러 군사기밀을 일본에 전달했는데, 야광도료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네모토특수화학은 패전 후 야광도료 기술을 활용해 세이코 시계의 문자판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야광도료 원료는 방사성 물질인 라듐이었죠. 방사성 물질이 위험하다는 인식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오히려 진짜 라듐을 사용한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시계 문자판 작업을 시작할 때, 방사능 측정을 하고 알람을 울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태평양의 작은 섬인 비키니 섬에 수소폭탄이 떨어져 낙진이 1㎝ 이상 쌓이고, 방사능의 영향으로 암환자와 기형아 출산이 늘어나는 사건 이후 일본은 방사선장해방지법을 시행했고 야광도료 수요업체들도 1991년까지 방사성 야광도료 퇴출을 선언했습니다.
네모토는 3년간의 노력 끝에 라듐을 사용하지 않는 야광도료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N야광이라는 이 기술로 기존 도료보다 10배 밝고, 10배 더 오래가는 형광도료를 만들었습니다. 이후 네모토는 1991년 일본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오코우치 기념상을 수상하며 야광도료 분야에서 독과점적인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9.11 테러사건 이후 미국은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시설의 비상계단에 형광 표시판 설치를 의무화했습니다. 동일본대지진 이후 일본의 지방자치단체들도 피난장소에 형광 표시를 의무화했죠. 스위스는 산악철도 사고 이후 터널 내에 형광 표시를 의무화했습니다.
규제를 극복하고 규제의 도움을 받은 네모토는 큰 사건이 발생하고 규제가 세질수록 더욱 성장하며 네모토센서엔지니어링, 네모토 사이언스, TN테크노스와 해외 8개 공장을 보유한 네모토그룹으로 발전했습니다.
코난화공은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인 포토레지스트 원료를 생산하는 업체입니다. 포토레지스트는 일본의 3개 수출규제 품목 중 하나로, 코난이 원재료의 90%를 생산합니다.
코난은 1952년 도쿄에서 사카린 공장으로 시작했습니다. 설탕이 부족한 시절이라 사카린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지만 코난은 사카린을 버리고 정밀화학으로 업종을 바꿉니다. 미국에 출장을 갔던 사장이, 사카린이 발암물질이라서 판매금지를 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장차 규제할 것을 대비해 정밀화학으로 사업 방향을 틀었던 것입니다. 사카린을 만들던 노하우를 이용해 일본 최초로 파라크레졸, 파라에틸페놀과 같은 화학품을 개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정밀화학 기술력은 포토레지스트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포토레지스트는 이물질이 조금이라도 들어가면 반도체 장비의 고장을 일으키는데 코난은 중국이나 인도의 경쟁기업과 달리 고도의 관리능력을 갖추어 세계시장을 석권했습니다. 규제를 피해 사카린을 버리고 정밀화학을 택한 덕분이었습니다.
규제는 기회의 다른 이름입니다. 기회를 살리는 방법은 기업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호리바는 배출규제를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기회로 살렸고, 니시무라철공소는 규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제품을 개발했습니다. 코난은 규제를 피해 업종을 과감히 바꾸었습니다. 네코토는 규제를 기술로 극복하며 경쟁자들이 들어올 수 없도록 진입장벽을 높였습니다.
일본의 전략물자 3개 품목 수출규제 우리나라 기업에게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대기업은 다변화를, 중소기업은 자립화를 꾀할 찬스입니다.
이 포스트는 『포스트 한일경제전쟁』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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