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린 ‘저팬 나노 2015’. 부대행사로 준비된 제13회 테크놀로지 종합 심포지엄에서 거브랜드 시더 MIT 교수(현 UC버클리대 교수)의 「소재 혁신 가속화를 위한 소재 게놈 접근법」이라는 발표의 전고체 배터리 개발 사례는 일본 업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반세기 이상 축적한 소재강국 일본의 근간을 흔드는 내용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기업인 A사는 2011년 5월, 꿈의 배터리라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 핵심인 전고체 신물질을 특허 등록했습니다. 배터리는 리튬이온의 이동속도가 성능을 좌우하는데, A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리튬이온이 빨리 움직이는 새로운 전고체 소재를 개발했고, 2012년 11월 특허를 공개할 예정이었죠. (전고체 배터리는 리튬이온 배터리의 액체 전해질을 고체로 바꾼 것입니다. 액체 전해질 배터리는 열이나 충격을 받으면 전해질이 흘러내려 폭발할 위험이 있지만 전고체 배터리는 폭발 위험이 적은 것은 물론 다른 장점들도 많습니다. 분리막이 필요없어 배터리 크기를 절반으로 줄일 수 있고, 얇게 만들어 구부릴 수도 있으며 배터리 용량도 늘어나 전기차에 장착하면 1회 충전으로 최대 700㎞ 이상 주행할 수 있습니다. 일본 후지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세계전고체전지시장은2035년 약 28조원으로 예상되며 일본 토요타자동차, 파나소닉, 한국 현대자동차,삼성전자 등이 연구개발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A사가 특허 공개를 앞둔 2012년 10월에 놀랍게도 MIT와 한국의 B사가 똑같은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한 것입니다. 화학업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소재개발은 7단계로 진행됩니다. 신소재는 원하는 특성을 가진 재료를 찾기 위해 소재 데이터를 분석하는 발견Discovery 단계에서 시작하여 개발Development, 물성 최적화Property optimization, 통합Integration, 인증Certification, 제조Manufacturing 단계를 거쳐 시장에 출시Release됩니다. 전체 과정은 통상 10~20년이 걸리죠.
MIT와 한국 B사의 한미연합은 어떻게 미공개 특허를 따라잡을 수 있었을까요?
이들은 긴 시간이 걸리는 실험을 하는 대신, 일본이 발표한 연료전지 논문정보를 기초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해서 일본의 미공개 특허와 같은 신물질 구조를 발견했습니다.
즉, 빅데이터와 인공지능과 같은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소재개발에 적용하여 소재의 물성에 대한 물리적ㆍ화학적 데이터를 신속히 파악하고, 소재 개발 데이터를 축적, 공유, 활용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는 따라잡기 어려운 신소재 기술을 1~2년 만에 완성하여 선발자를 추월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죠.
놀란 일본은 이러한 한미 연합의 추월에 자극을 받아 2018년 새로운 소재개발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는 ‘초첨단재료 초고속개발 기반기술 프로젝트’라는 사업으로, 재료 전문가와 데이터과학 전문가가 협업하고 슈퍼컴퓨터와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소재개발 기간을 20분의 1로 단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죠. 도레이, 쇼와덴코, 신일철, JSR, 무라타제작소 등 20여 개 업체가 첨단소재고속개발기술연구조합을 결성했고, 일본 경제산업성이 매년 24억 엔 규모의 예산을 지원하는 사업입니다.
초고속 소재개발에 대한 일본의 지원은 다소 늦은 편입니다. 미국은 2011년 국가과학기술위원회NTSC 주도로 소재게놈이니셔티브MGI, Materials Genome Initiative를 선언하고 2014년에 국가전략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유럽도 2015년 연구혁신 프로그램Horizon 2020의 하나로 소재빅데이터 구축사업NOMAD, NOvel MAterial Discovery을 추진했습니다. 중국 또한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 정책에 소재 게놈 엔지니어링프로그램을 포함시켰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2000년에 소재DB 구축사업을 시작했고, 2019년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대책을 통해 이를 더강화하며 금속, 화학, 세라믹 등 5개 분야에서 가상 시뮬레이션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근 서울대학교 교수의 저서 『경제 추격론의 재창조』에 따르면, 선발자가 등장해서 시장을 장악했다가 쇠락하고, 새롭게 진입한 후발자가 선발자를 시장에서 몰아내며, 그들 역시 차세대 후발자에게 자리를 내주는 것이 산업의 통상적인 순환경로입니다.
산업 주도권의 국가 간 이전은 새로운 기술혁신이나 새로운 기술-경제 패러다임의 등장, 경기불황과 시장 수요의 변화, 정부나 규제의 비대칭적 역할 등 ‘기회의 창’이 열렸을 때 일어납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발주자가 공격적으로 비약Leapfrogging 전략을 선택하고, 선발자의 실수기존 기술에 집착하는 선발자 함정에 빠지는 등 가 맞물릴 때 시장점유율의 역전과 주도권 이전이 발생하죠.
이 포스트는 『포스트 한일경제전쟁』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왜 새로운 소부장강소기업이 없을까? (0) | 2020.08.19 |
---|---|
왜 일본은 장기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0) | 2020.08.18 |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하는 게 중요한 이유 (0) | 2020.08.17 |
내리막 섬유패션산업에서 날개 단 기업의 비결은? (0) | 2020.08.14 |
규제를 기회로 살린 소부장 기업은? (0) | 2020.08.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