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는 우리나라에 일찍 들어와 꽤 친숙하지만, 막상 그 철학을 접해보면 생소한 개념과 한자들이 많이 등장해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불가는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일 것 같은 겉보기와는 다르게 현실주의적 사상입니다.
석가가 던진 문제제기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가?’ ‘인간은 왜 이렇게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인가?’
“지나고 보면 그때가 행복했다는 생각이 들 거야.” 어른들이 나이가 더 어린 사람들에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 3 때는 대학에만 들어가면 행복할 것 같죠?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을 준비하느라 허덕입니다. 취업만 되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것 같죠? 취업하면 진급시험을 준비해야죠. 승진하면 문제가 다 해결될 것 같죠? 대답_이제는 잘릴까봐 걱정입니다. 직장에서 안 잘리면 다행이다 싶죠? 노후는 또 어떡하나요? 이러는 사이 나는 늙어가고 몸이 여기저기 아픈 신호를 보내옵니다.
“인생은 고해(苦海)다!” 석가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며, 인간은 4가지 고통인 사고(四苦)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생로병사가 모두 고통입니다. 이것을 고성제(苦聖諦)라고 합니다. 고성제란 미혹(迷惑;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인 이 세상은 모두 고통[苦]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는 인간이 고통 받고 사는 이유는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집성제’(集聖諦)라고 합니다.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도 돈을 더 벌려고 애쓰는 걸까요? 애인과 헤어지면 왜 슬프고 고통스러운가요? 석가는 이를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욕망에 대한 집착은 왜 생겼을까요? 도가는 인간의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 등 오감 때문에 욕망에 대한 집착이 생겼다고 하지만 불가사상에서 오감은 인간을 만드는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석가는 인간은 5가지의 온(蘊)인 오온(五蘊)이 있으며, 이 오온(五蘊)이 일으키는 삼독(三毒) 때문에 욕망에 집착한다고 보았습니다.
석가는 생멸·변화하는 모든 것은 오온(五蘊)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봅니다. 한자 온(蘊)은 ‘쌓다’라는 뜻입니다. 오온은 인간으로 보면 육체인 색온(色蘊), 감각·인상인 수온(受蘊), 지각 또는 표상인 상온(想蘊), 마음의 작용인 행온(行蘊), 마음인 식온(識蘊)을 말합니다. 이것들이 상호의존적으로 쌓여서 ‘마치 자아처럼 보이는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이죠.
석가는 오온(五蘊)을 절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를 삼독(三毒)으로 설명합니다.
석가에 의하면, 인간은 원래 맑고 청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부처는 이미 내 마음에 있으며 인간의 심성 안에는 불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과정에서 삼독(三毒) 때문에 그 착한 심성이 흐려지고 욕망과 집착에 빠집니다. 그 삼독이 바로 ‘탐·진·치’입니다. 이 독들을 불교에서는 흔히 ‘번뇌’라고 말합니다.
탐(貪)은 탐욕의 줄임말로 ‘탐내어 그칠 줄 모르는 욕심’입니다.
진(瞋)은 진에(瞋恚)의 줄임말로 ‘눈을 부릅뜨다, 성내다’, 한마디로 ‘노여움’이지요.
치(痴)는 우치(愚癡)의 줄임말로 ‘어리석음’입니다.
석가는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면 괴로움이 소멸하는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를 멸성제(滅聖諦)라고 합니다. 멸(滅)은 ‘없애다’라는 뜻이죠.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제법무아, 색즉시공
눈·코·입·귀 같은 인간의 몸인 색(色)이 욕망의 근원이라고 이를 없앨 수 있나요? 눈이나 코를 잘라낼 수도 없을 뿐더러 눈감고 코 막고 살 수도 없잖아요. 그러니 석가에 의하면 욕망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려면 내 오감의 상대성을 깨닫고 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입니다. 나를 버리는 것, 나를 비우는 것, 즉 ‘공(空)의 경지’이지요.
나를 버리는 무아(無我)를 하지 못하면 무명의 상태가 됩니다. 이때 무명(無明)이란 밝음이 없는 상태로 무상(無常), 무아(無我)함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무(無)와 공(空)은 같은 뜻이 아닙니다. ‘무’는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공’은 실체는 있지만 실상 뒤집어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석가는 오온의 실체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불가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등장합니다.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우리에게 ‘색즉시공’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유명한 말은, 사실 색(色)의 실체는 공(空), 즉 겉으로는 대단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수상행식 역부여시(受想行識 亦復如是)는 수온·상온·행온·식온 역시 마찬가지라는 뜻이지요.
자타불이
이 공(空)의 경지는 한 인간 내부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대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석가는 인간이 욕망에 대한 집착을 끊어버린다면,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자타불이(自他不二), 즉 ‘나와 네가 둘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경지에 도달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나와 너를 차별하니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누가 와서 내 돈을 훔쳐 가면 고통스럽죠? 하지만 자타불이 하여 나와 너를 차별하지 않는다면 그 상황이 굳이 고통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무주상보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는 어떤 경지일까요?
예수나 석가 둘다 무차별적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하지만 둘의 사랑은 조금 다릅니다. 예수가 길에서 여러분을 만나면 아마 불쌍하게 여겨 오히려 돈을 더 줄 것입니다.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밀어라.’
석가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가 여러분을 만났다면 “누구시더라?”라고 하며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본인이 돈을 빌려준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주상보시란 대승불교도들의 실천덕목 중 하나로 집착이 없이 베푸는 보시, 즉 내가 자비를 베푼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주 듣는 ‘보시’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합니다. 이제 보시의 확실한 뜻을 아시겠죠?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인간의 삶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상황마저 같다고 인식하는 경지가 바로 무주상보시의 경지인 것입니다. 이 경지까지 도달해 야만 “공(空)을 깨달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고요.
고성제는 ‘인생은 고통의 바다’라는 것으로 현실세계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집성제는 인간의 심성은 본래 청정했으나 탐욕과 화냄, 어리석음 등 탐·진·치의 삼독으로 인해 욕망에 대한 집착이 생기고 이로 인해 인간은 고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현실세계의 원인, 즉 ‘왜 인생은 고해인가?’를 말해 줍니다.
멸성제는 ‘모든 욕망에 대한 집착을 없애자’, 즉 나를 버리고 제법무아를 하면 열반, 해탈의 경지에 오르며, 그래야 자타불이의 경지에 들어서서 자비를 행하게 된다는 것이죠. 이것이 대승불교의 사상입니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적 경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석가는 바른 도를 닦기 위한 도성제를 제시합니다. 공(空)은 ‘헛되다’가 아니라 ‘비우다’라는 의미인데, 나를 비우는 공의 경지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8가지 바른 도인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상적 세계, 즉 해탈에 도달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 포스트는 『동양고전의 바다에 빠져라』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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