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즈음 알아보는 불교 : 대승불교
인도에서 생긴 불교는 히말라야 산맥 때문에 바로 중국으로 전파되지 못하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쪽으로 먼저 옮겨간 후 다시 중국에 전해집니다.
그 아프가니스탄의 지명이 바로 ‘간다라’입니다. 간다라 미술에 대해 들어보셨죠? 그러니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원래 인도의 불교와는 성격이 달랐습니다. 나중에 중국 사람들이 인도불교는 ‘소승불교’, 자기네 불교는 ‘대승불교’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소승불교가 아니라 ‘남방불교’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입니다.
소승불교(남방불교)는 개인의 해탈과 엄격한 종교성을 강조한 반면에 대승불교(북방불교)는 대중교화와 자비의 실천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자세히 볼까요?
대승불교는 1세기쯤 『반야경』의 출현과 2, 3세기 용수(龍樹, 150?~250?)의 일체개공 및 중도의 사상으로 시작됩니다. 용수는 출가하여 소승불교를 배우다가 후에 히말라야 산으로 들어가 노비구(老比丘)로부터 대승불교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후 초기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을 깊이 연구하고 많은 주석서를 저술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세웠습니다.
일체개공(一切皆空)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이 텅 비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아무 실체도 없다는 허무주의는 아닙니다.
공(空)이란 ‘변화하지 않는 딱 정해진 존재란 없다’는 뜻입니다. 현상계의 만물은 여러 인연들이 얽히고설켜서 항상 변화하는 것이고 그래서 본질이 비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질은 텅 비어 있으되 그렇다고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죠? 공(空) 안에는 분명히 현상계의 실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실체는 또 공(空)한 것이고요. 그래서 색(色)이 공(空)이요, 공(空)이 색(色)인 것입니다. 이 같은 관계를 중도(中道)라고 말합니다.
대승불교의 공(空)사상은 ‘공’을 깨달아 아집과 욕망, 집착과 괴로움에서 벗어난 후 ‘대중과 함께’ 바라밀을 실천하자는 사상입니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라고 할 때 ‘승’(乘)은 수레라는 뜻입니다. 소승불교가 혼자 타는 수레라면 대승불교는 대중과 함께 타는 큰 수레라고 할 수 있지요.
경주 감산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불교에서 보시는 베푼 것까지 잊어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거지에게 돈을 주고 그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보시가 아니며 돈을 준 사실 자체를 잊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한 보시행을 행할 수 있는 자가 바로 보살입니다.
대승불교에서 이상적 인간상은 보살입니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사람이지요. 나보다 남을 위해서 봉사하며 자비로운 마음을 가지고 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라밀은 욕망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쪽으로부터 번뇌와 고통이 없는 저쪽으로 건너간다는 뜻으로,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보살의 수행을 가리킵니다. 바라밀 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불교경전이 바로 반야심경이죠. 즉 보살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나에 대한 이기적 집착을 버리는 ‘공의 사상’을 철저히 깨닫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죠.
큰 틀에서 소승불교와 대승불교는 같습니다. 단지 둘의 차이점은 ‘인간 내부와 인간과 사회의 관계, 둘 중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느냐’에 있습니다.
이 포스트는 『동양고전의 바다에 빠져라』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