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오뚜기 홈페이지
2015년 오뚜기 진짬뽕이 처음 등장한 이후, 2016년 라면시장에는 중화라면의 전성기가 도래했다. 홈플러스의 발표에 따르면, 진짬뽕은 부동의 1위인 신라면을 꺾고 잠시나마 판매량 1위로 등극하기도 했다. 덕분에 오뚜기의 국내 라면시장 점유율은 2014년 16.3%에서 2016년에는 22%를 웃돌았다.
중화라면은 일반 라면에 비해 가격이 2배에 가깝다. 라면은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며, 중화라면 열풍이 불었던 시기에 소비심리가 좋지 않았음에도 2배나 비싼 프리미엄 라면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몇몇 언론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의구심을 품은 기사를 쓰기도 했다. 혹자는 ‘프리미엄 라면시장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시야를 라면시장으로 국한하여 매우 좁게 바라본 것이다. 소비시장 전체로 넓혀서 보면 ‘대량생산 체제의 본격적인 추격의 시작’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진짬뽕, 짜왕 등의 중화라면은 모두 한국식 중화요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자는 짬뽕이고 후자는 자장면이다. 둘 다 국민외식으로 불리며, 한때 정부가 물가관리를 위해 가격변동까지 보고를 받았던 음식이다.
자장면이나 짬뽕이나 비싼 외식이 아니다. 집에서 흔하게 배달해 먹는 음식이지만, 가격이 4,000~6,000원에 불과하며, 지역에 따라서는 3,000원대인 곳도 있다. 직장인의 저렴한 한끼 식사 메뉴로 꼽히는 한국식 백반도 서울 지역에서는 이보다 더 비싸다. 이처럼 외식으로서 자장면과 짬뽕의 최대 강점은 저렴한 가격에 있다.
동네 어디서나 손쉽게 배달해 먹을 수 있는 흔한 메뉴지만, 품질이 좋다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동네 중국집들은 고만고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맛의 차이가 크지 않다.
과거에 중국집들의 차별화 요소는 ‘주문 후에 얼마나 빨리 배달하느냐’였다. 소비자가 원하는 배달속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사전에 미리 준비해두고, 주문이 오면 그것을 내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다. 그러다보니 불맛은 찾아보기 힘들고 과조리의 흔적이 잔뜩 남아 맛을 탁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또한 모든 요리가 그렇지만, 특히 면 요리는 만든 즉시 바로 먹어야 가장 맛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맛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그런데 배달의 경우 아무리 빨리 받아도 만든 지 꽤 지난 면요리를 먹게 된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의 중국집들이 맛의 차별화가 되지 않고 비슷한 수준에 머무르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오뚜기 홈페이지
그런 와중에 진짬뽕과 짜왕 같은 대량생산품이 등장했다. 짬뽕과 자장면의 조리법과 생산을 대량생산에 맞게 체계화하면서 맛을 흉내냈다.
그런 의미에서 ‘모방식품’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기술발전으로 대량생산된 중화라면들은 맛이 크게 향상되었다. 심지어 배달음식에서 느낄 수 없었던 불맛까지 느낄 수 있었다. 대량생산품에서는 그것이 진짜 불맛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반적인 오리지널 음식이 내지 못했던 맛까지 제공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중화라면 4~5개들이 멀티팩의 가격이 중국집 짬뽕과 자장면 한 그릇 가격과 비슷하다. 어차피 둘 다 자극적인 맛이긴 마찬가지고, 똑같진 않아도 어느 정도 비슷한 맛을 내는데, 가격이 오리지널의 1/4이라면 소비자들이 무엇을 선택할지는 명백하다. 특히나 배달, 외식 메뉴로서의 강점이 가격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 우위를 대량생산 식품에 확실하게 탈취당한 셈이다.
즉, 짜왕과 진짬뽕의 성공은 프리미엄 라면이라서가 아니라, 기술력으로 오리지널 상품과 질의 간극을 좁히고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보았기 때문이다. 불황에도 프리미엄 제품이 팔린다고 놀라워할 것이 아니라, 불황이라 원래부터도 특별하지 않았던 오리지널 상품이 더 저렴한 대량생산품으로 대체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대체효과’라고 한다.
이것은 기존 자영업자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기술발전으로 대량생산된 상품들이 오리지널과의 간극을 좁혀간다. 이런 현상에 따라잡히지 않으려면 질의 향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하지만 한국의 자영업자 중에서 상당수는 이러한 연구개발을 하지 않는다. 그저 해온 대로 하고, 만든 것만 계속 만든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관성적인 측면이 있지만, 환경적으로 어려운 측면도 있다. 대다수의 자영업자들은 생계형으로 하루에 12시간 이상 가게를 열고 노동을 한다. 여유시간이 따로 있어야 상품과 서비스의 향상에 투자할 수 있는데, 쉬는 날도 없이 일만 하다 보니 하던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소비시장의 대형 이슈 중 하나인 편의점 도시락이다. 과거 삼각김밥으로 대표되던 편의점 먹거리는 맛보다는 싼 맛에 뭐라도 뱃속에 집어넣기 위한 음식에 가까웠다. 이러한 인식에 균열을 낸 것이 바로 GS25에서 내놓은 ‘김혜자 도시락’이다. 탤런트 김혜자 씨는 오랫동안 많은 식재료의 광고 모델을 해왔기에 편의점 도시락에 대한 기존의 이미지를 쇄신할 수 있었다. 내용물도 생각보다 충실해서 가격 대비 양과 질이 제법 괜찮았다. 덕분에 ‘저렴하면서도 많은 양과 괜찮은 질’을 표현하는 말로, ‘혜자’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편의점 음식의 질적 수준이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물론 도시락을 비롯한 편의점 먹거리의 질이 충분히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가격을 감안하면 꽤 먹을 만한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기존 도시락 업체들뿐만 아니라 여전히 과거 수준을 답습하고 있는 동네 음식점과의 차이도 좁힌 것이다.
대형마트의 냉동식품 코너를 가보자. 몇몇 냉동만두나 냉동피자는 만두는 “꽤 훌륭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거에 비해 진일보를 이루었다. 기술이 이만큼 따라온 것이다.
과거의 자영업자들은 다른 자영업자들과 경쟁하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래서 지역 내의 경쟁강도가 폐업 위험을 결정하는 큰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는 대량생산품도 새로운 경쟁자가 되었다. 가격경쟁력으로는 그들을 절대 이길 수 없다. 애당초 대량생산 시스템 자체가 가격경쟁력에 특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자영업자는 자본력에 밀려서 망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지금은 양상이 좀 다르다. 자본력뿐만 아니라 품질에서도 쫓기고 있다. 대량생산 업체들은 매년 상품을 더 발전시키기 위해 많은 돈을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그 결과 질적 향상이 빨라졌다. 그런데 한국의 자영업자들은 어떠한가? 물론 꾸준히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는 옛날과 오늘이 결코 다르지 않다.
내 아이템이 현재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느 정도 모사가 가능한가를 파악해야 한다. 특히 대량생산품이 할 수 없는 영역에서 강점을 발견하고 찾아내야 한다. 지난 중화라면 열풍이 시사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다. 대량생산품이 작은 가게들의 영역을 파고들고 있으며 거세게 추격하고 있다.
이 포스트는 『골목의 전쟁 : 소비시장은 어떻게 움직이는가』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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