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 East of the Sun, West of the Moon
어느 날, 흰 곰 한 마리가 가난한 농부에게 가장 예쁜 막내딸을 주면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막내딸은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해 흰 곰을 따라갔다. 흰 곰은 그녀를 산속 마법의 성으로 데려갔다. 밤이 되어 여자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눕자 한 남자가 옆에 누웠다. 트롤인 계모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흰 곰, 밤에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왕자였다. 밤에 남자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 외에 여자는 모든 것이 안락했다.
여자는 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졸랐고, 흰 곰은 이곳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여자를 집으로 보냈다. 여자는 어머니의 회유에 흰 곰과의 생활을 털어놓았고 어머니는 왕자가 아니라 트롤일 거라며, 누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라고 했다.
성으로 돌아온 여자는 엄마가 준 양초를 켜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주 잘생긴 왕자였다. 더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촛농을 남자에게 떨어뜨렸다. 잠에서 깬 왕자는 여자와 일 년을 살면 마법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을 텐데, 이제 계모의 딸인 트롤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고 통탄했다. 왕자는 ‘계모의 성은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여자는 왕자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파를 만났다.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성에 가는 길을 아나요?”
노파는 자신은 모르니 다른 노파에게 물어보라며 타고 갈 말과 황금 사과를 내어주었다. 두 번째 노파 역시 성의 위치를 몰랐고, 세 번째 노파에게 보내며 말과 황금 물레빗을 주었다. 세 번째 노파도 알지 못했고, 동쪽 바람이 알고 있을 거라며 말과 황금 물레를 주었다.
여자는 멀고 험한 길을 말을 타고 가서 마침내 동쪽 바람을 만났다. 하지만 동쪽 바람은 자신의 형제인 서쪽 바람이 알 거라며 여자를 등에 태우고 서쪽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서쪽 바람도 알지 못한다며 여자를 남쪽 바람에게 데려다주었다. 남쪽 바람 역시 몰라 북쪽 바람에게 데려다주었다. 북쪽 바람은 딱 한 번 버드나무 잎사귀 하나를 거기까지 날려본 적이 있다면서 머나먼 바닷가 성까지 여자를 태워다주었다.
마침내 여자는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성에 도착했다. 성의 창문 아래에 앉아 황금 사과를 만지작거렸더니 트롤 공주가 사과를 탐냈다. 여자는 오늘 밤 이 성의 왕자님 옆에서 보내게 해주면 황금 사과를 주겠노라고 했고, 공주는 이를 승낙했다.
계모는 그날 밤 왕자의 차에 수면제를 탔고, 여자는 왕자를 깨우려고 애쓰다 처량하게 울면서 나왔다. 다음 날 여자는 황금 물레빗을 주고 하룻밤을 왕자 옆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왕자는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다. 세 번째 날에는 황금 물레를 주는 대가로 왕자 옆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행히 마시는 척 차를 버린 왕자는 여자에게 말했다. “내일이 공주와의 결혼식이에요. 하지만 나는 공주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만이 내 마법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니까.”
다음 날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왕자가 말했다. “신부가 제게 맞는 사람인지 알아보아야겠습니다. 결혼식 예복으로 입을 이 셔츠(예전에 여자가 촛농을 떨어뜨린 셔츠)에 묻은 얼룩을 빨아서 지울 수 있는 여자만이 제 신붓감입니다.”
트롤 공주는 셔츠를 빨기 시작했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보다 못한 계모가 나섰지만 얼룩이 더 심해져서 시커멓게 변했다. 하인과 하녀들도 나섰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두 얼룩을 지우지 못하는군요. 그렇다면 성 밖에 앉은 저 거지 여인은 어떨까요?” 여자가 셔츠를 빨자 눈처럼 하얗게 변했다. 왕자는 “이 여자가 내 신붓감”이라고 선언했고 계모와 트롤 공주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터져 죽어버렸다. 여자와 왕자는 성의 황금과 보물을 가지고 멀리 멀리 떠나 행복하게 살았다.
여자는 대체로 관계 지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그 옆에서 안착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여자가 많다. 나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마 더 정확하게 대답하자면 사랑을 통해 내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절대 사랑의 여정은 홀연히 나타난 왕자에게 픽업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여정은 그렇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에는 설사 왕자가 나타난다고 한들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볼 눈이 없다. 그래서 남자는 이 동화에서 사람이 아닌 흰 곰으로 여자에게 온다(또는 여성의 삶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동화인 「노르웨이의 황소」에서는 검은 황소로 온다).
여자가 어린 시절에는 아직 흰 곰이란 거죽 아래에 있는 남자의 본래 정체성을 볼 눈이 없다. 그래서 홀연히 나타난 상대에게 수동적으로 이끌려가 밤의 장막 안에서 꾸린 사랑은 쉽게 몰락한다. 그래서 흰 곰이 데려간 성이 마법에 걸린 성인 것이다.
마법에 걸린 상태는 영어로 ‘enchanted’된 상태이다. 그러니까 주문 혹은 주술chant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어리고 미숙한 여자에게 남자의 본질은 밤의 장막에 덮인 듯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여자가 터부를 깨고 약속을 깨뜨리자 마법은 깨지고 성 역시 사라진다. 주술에서 깨어난 상태는 ‘disenchantment’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흔히 ‘환멸’이라고 번역한다. 즉, 마법에 걸려 세상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때가 사랑이라는 마법에 빠진 상태라면, 그러한 사랑에서 깨어나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상태는 바로 ‘환멸’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로맨스라는 마법은 그렇게 쉽사리 잘 깨어지는바, 문득 내동댕이쳐지듯이 꿈에서 깨어나 사랑을 잃고 혼자 남은 자신과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사랑에서 깨어난 환멸의 맛은 개흙 내음 잔뜩 배인 이끼에 얼굴을 박은 것 같아서 사랑 마법의 달콤한 착각을 무색하게 만든다.
트롤인 계모와 공주는 여자 세계 속의 부정적인 힘들이다
. 낮은 자존감, 자기 비하, 질투, 의심 등 부정적인 내면의 사금파리들이 누구든 그 속에 있다.현실에서는 아마 진정한 영혼의 짝을 못 만날지도 모른다
.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고 동서남북 세상을 샅샅이 훑어서 내면에 황금빛 자질들을 일구어낸다고 해도, 정작 영혼의 짝을 못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신비는 따로 있다.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꽃같은 말만 하라는 세상에 던지는 뱀같은 말 (0) | 2018.07.11 |
---|---|
나는 엄마가 죄인이었으면 좋겠다 (0) | 2018.07.09 |
가시덤불 속에서 일부러 사랑을 시험하는 당신에게 (0) | 2018.07.03 |
넌 나처럼 살지 마, 난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 우리 안의 라푼젤과 고델 부인 (0) | 2018.07.02 |
왜 하필 빨간 두건이 달린 빨간 망토일까? (0) | 2018.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