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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찾아 세계 끝까지 가서 마주한 건 무엇일까

인문 교양 읽기/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by 스마트북스 2018. 7. 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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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찾아 세계 끝까지 가서 마주한 건 무엇일까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 | East of the Sun, West of the Moon
 
어느 날, 흰 곰 한 마리가 가난한 농부에게 가장 예쁜 막내딸을 주면 부자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 막내딸은 부모와 형제자매를 위해 흰 곰을 따라갔다. 흰 곰은 그녀를
산속 마법의 성으로 데려갔다. 밤이 되어 여자가 불을 끄고 침대에 눕자 한 남자가 옆에 누웠다. 트롤인 계모의 마법에 걸려 낮에는 흰 곰, 밤에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왕자였다. 밤에 남자의 얼굴을 전혀 볼 수 없다는 것 외에 여자는 모든 것이 안락했다.
여자는 집에 다녀오고 싶다고 졸랐고, 흰 곰은 이곳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조건으로 여자를 집으로 보냈다. 여자는 어머니의 회유에 흰 곰과의 생활을 털어놓았고 어머니는 왕자가 아니라 트롤일 거라며누운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라고 했다.
성으로 돌아온 여자는 엄마가 준 양초를 켜서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아주 잘생긴 왕자였다. 더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촛농을 남자에게 떨어뜨렸다. 잠에서 깬 왕자는 여자와 일 년을 살면 마법이 풀려 자유의 몸이 되었을 텐데, 이제 계모의 딸인 트롤 공주와 결혼해야 한다고 통탄했다 왕자는 계모의 성은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다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버렸다.
여자는 왕자를 찾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노파를 만났다.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성에 가는 길을 아나요?”
노파는 자신은 모르니 다른 노파에게 물어보라며 타고 갈 말과 황금 사과를 내어주었다. 두 번째 노파 역시 성의 위치를 몰랐고, 세 번째 노파에게 보내며 말과 황금 물레빗을 주었다. 세 번째 노파도 알지 못했고, 동쪽 바람이 알고 있을 거라며 말과 황금 물레를 주었다.
여자는 멀고 험한 길을 말을 타고 가서 마침내 동쪽 바람을 만났다. 하지만 동쪽 바람은 자신의 형제인 서쪽 바람이 알 거라며 여자를 등에 태우고 서쪽으로 날아간다. 하지만 서쪽 바람도 알지 못한다며 여자를 남쪽 바람에게 데려다주었다. 남쪽 바람 역시 몰라 북쪽 바람에게 데려다주었다. 북쪽 바람은 딱 한 번 버드나무 잎사귀 하나를 거기까지 날려본 적이 있다면서 머나먼 바닷가 성까지 여자를 태워다주었다.
마침내 여자는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에 있는 성에 도착했다. 성의 창문 아래에 앉아 황금 사과를 만지작거렸더니 트롤 공주가 사과를 탐냈다. 여자는 오늘 밤 이 성의 왕자님 옆에서 보내게 해주면 황금 사과를 주겠노라고 했고, 공주는 이를 승낙했다.
계모는 그날 밤 왕자의 차에 수면제를 탔고, 여자는 왕자를 깨우려고 애쓰다 처량하게 울면서 나왔다. 다음 날 여자는 황금 물레빗을 주고 하룻밤을 왕자 옆에서 보냈지만 여전히 왕자는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다. 세 번째 날에는 황금 물레를 주는 대가로 왕자 옆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다행히 마시는 척 차를 버린 왕자는 여자에게 말했다. 내일이 공주와의 결혼식이에요. 하지만 나는 공주와 결혼하지 않을 거예요. 당신만이 내 마법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여자니까.”
다음 날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왕자가 말했다. 신부가 제게 맞는 사람인지 알아보아야겠습니다. 결혼식 예복으로 입을 이 셔츠(예전에 여자가 촛농을 떨어뜨린 셔츠)에 묻은 얼룩을 빨아서 지울 수 있는 여자만이 제 신붓감입니다.”
트롤 공주는 셔츠를 빨기 시작했지만, 얼룩은 지워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졌다. 보다 못한 계모가 나섰지만 얼룩이 더 심해져서 시커멓게 변했다. 하인과 하녀들도 나섰지만 마찬가지였다.
모두 얼룩을 지우지 못하는군요. 그렇다면 성 밖에 앉은 저 거지 여인은 어떨까요?” 여자가 셔츠를 빨자 눈처럼 하얗게 변했다. 왕자는 이 여자가 내 신붓감이라고 선언했고 계모와 트롤 공주는 화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터져 죽어버렸다. 여자와 왕자는 성의 황금과 보물을 가지고 멀리 멀리 떠나 행복하게 살았다.


사랑이라는 기만

여자는 대체로 관계 지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그 옆에서 안착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여자가 많다. 나에게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랑이라고 대답할지도 모른다. 아마 더 정확하게 대답하자면 사랑을 통해 내가 완성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절대 사랑의 여정은 홀연히 나타난 왕자에게 픽업되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그 여정은 그렇게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어린 시절에는 설사 왕자가 나타난다고 한들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볼 눈이 없다. 그래서 남자는 이 동화에서 사람이 아닌 흰 곰으로 여자에게 온다(또는 여성의 삶의 원형을 잘 보여주는 동화인 노르웨이의 황소에서는 검은 황소로 온다).
여자가 어린 시절에는 아직 흰 곰이란 거죽 아래에 있는 남자의 본래 정체성을 볼 눈이 없다. 그래서 홀연히 나타난 상대에게 수동적으로 이끌려가 밤의 장막 안에서 꾸린 사랑은 쉽게 몰락한다. 그래서 흰 곰이 데려간 성이 마법에 걸린 성인 것이다.
마법에 걸린 상태는 영어로 ‘enchanted’된 상태이다. 그러니까 주문 혹은 주술
chant 안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다. 어리고 미숙한 여자에게 남자의 본질은 밤의 장막에 덮인 듯 아득하게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여자가 터부를 깨고 약속을 깨뜨리자 마법은 깨지고 성 역시 사라진다. 주술에서 깨어난 상태는 ‘disenchantment’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흔히 환멸이라고 번역한다. , 마법에 걸려 세상이 모두 아름답게 보이는 때가 사랑이라는 마법에 빠진 상태라면, 그러한 사랑에서 깨어나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상태는 바로 환멸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로맨스라는 마법은 그렇게 쉽사리 잘 깨어지는바, 문득 내동댕이쳐지듯이 꿈에서 깨어나 사랑을 잃고 혼자 남은 자신과 현실에서 마주하게 된다. 사랑에서 깨어난 환멸의 맛은 개흙 내음 잔뜩 배인 이끼에 얼굴을 박은 것 같아서 사랑 마법의 달콤한 착각을 무색하게 만든다.

과거, 현재, 미래가 주는 선물

여자는 왕자를 찾는 여정에서 늙은 세 여인으로부터 세 가지 선물을 받는다. 황금 사과gold apple, 황금 물레빗 gold carding comb, 그리고 황금 물레gold spinning wheel는 각각 여자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여정에서 얻는 것이다.
사과는 시간과 더불어 맺혀 열리는 열매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가꾸어 맺은 내면의 자질들은 황금 사과가 되어 여자의 삶에 귀한 선물이 된다. 물레빗은 물레질을 하며 실을 지을 때에 실이 엉키지 않도록 고르는 것이다. 위대하고 영웅적인 행위가 극적으로 벌어져 얻는 선물이 아니며, 올 한올 소소한 일상을 견디는 정성스러움으로 내면에 일구는 선물이다.
또 황금 물레는 미래를 나타낸다. 원래 운명의 세 여신은 물레질을 해서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한다. 혼자가 된 여자에게 주어진 물레는 과거와 현재에 얻은 선물을 통해 미래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얻는 거라 볼 수 있다.
늙은 여인은 항상 여자의 내면 속 오래된 지혜를 상징한다. 이들에게 선물을 받는 것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을 거치며 시련을 겪은 여자가 내면의 힘을 얻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비로소 타인의 우주와 만나다

여자는 선물을 얻은 후 동서남북, 네 방위로 부는 바람을 타고 온 세계를 방랑한다. 태양의 동쪽, 달의 서쪽은 온 세계를 다 뒤져서 간신히 도착할까 말까 한 곳이다. 가장 거칠고 센 북쪽 바람이 간신히 나뭇잎을 한 번 불어보낸 적 있을 정도로 아스라한 곳이기도 하다.
사람은 모두 자기 우주의 중심이다. 이 여자를 우주의 중심으로 놓고 머릿속으로 그려본다면, 동서남북 네 방위의 바람이 수평으로 불어 뻗어 나가는 세상, 그리고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이 축적되어 만드는 수직의 축이 그녀의 우주를 그려낸다. 팽창하며 회전하는 한 여자의 우주가 그렇게 이 동화의 여정 속에 담겨 있다.
여자는 여정에서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간신히 아스라이 먼 곳에 도달해서 왕자를 만난다. 여자가 몽매하거나 고스러웠던 자아의 경계를 접어서 수그릴 수 있을 때, 드디어 타인을 자신의 우주에 들여놓는 접점이 생긴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에고밖에 주장할 줄 몰랐고, 사랑조차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을 사랑하던 미성숙했던 우주는 그렇게 자신의 우주 변방에서 에고를 굽혀 수그릴 때에 타인의 우주와 만날 수 있다   

자신이 만든 얼룩을 하얗게 빨아

트롤인 계모와 공주는 여자 세계 속의 부정적인 힘들이다. 낮은 자존감, 자기 비하, 질투, 의심 등 부정적인 내면의 사금파리들이 누구든 그 속에 있다.
사랑이라는 에너지가 내면을 휘저으면 그 깊숙이 가라앉아 있던 사금파리들이 떠올라 다시 여자를 찌른다. 사랑이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한 사람의 됨됨이를 휘저어 다시 담금질하는 강렬한 시험이기 때문이다.
사금파리가 날카롭지 않은 사람들도, 몇 개 안 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사랑 앞에 흔들리면 내면의 부정적인 힘들이 또다시 올라온다. 어릴 적에는 미숙하여 이 시험에서 실패했지만, 실패와 상실, 시련의 과정을 거친 여자에게는 이제 황금빛으로 무르익은 내면의 힘들이 있다. 그래서 여자는 이 내면의 힘들을 한 번씩 써가며 왕자에게 다시 다가간다. 이제 로맨스라는 환상으로 남자의 본질을 보지 못했던 어리숙했던 여자는 고된 삶의 여정을 통해 얻은 내면의 힘으로 참신부가 된다. 그리고 자신이 만들었던 얼룩을 하얗게 빨아낸다.
빨래는 화학적인 변화이다. 이제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하겠다. 자신을 치유하는 힘을 얻어 새롭게 거듭났을 때 내면의 부정적인 힘들을 상징하던 트롤 계모와 공주는 터져서 죽는다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

현실에서는 아마 진정한 영혼의 짝을 못 만날지도 모른다. 과거-현재-미래를 아우르고 동서남북 세상을 샅샅이 훑어서 내면에 황금빛 자질들을 일구어낸다고 해도, 정작 영혼의 짝을 못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정의 신비는 따로 있다.
성배Holy Grail를 찾아 멀고 고된 순례의 길을 떠난다고 치자.
기독교 문명권인 서구에서 순례 여행은 자아를 완성시켜주는 기적을 찾는 여정이며, 이를 위해 시련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대부분 성배 앞에 도달해서 뒤돌아보면 멀고 긴 길을 걷느라 바로 자신이 신께 공양되는 잔이 되었음을 알게 되는 그런 신비랄까. 그래서 여정 끝에 왕자를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 왕자와의 결합으로 상징되는 여성의 자아 완성은 왕자를 찾는 여정 중에 서서히 이루어지니까.
그래서 가끔 꿈을 꾼다. 태양의 동쪽 바람의 서쪽에 있는, 그러니까 아무데도 없는 왕자를 찾느라 나는 서쪽 바람을 타고 세상을 언제까지고 날고 있다. 목적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아버리면, 바람을 타고 나는 순간을 즐기게 된다. 고되더라도 삶이라는 여정에 빙긋 웃음을 지어보일 수 있는 황금빛 지혜는 그렇게 내 속에서 영근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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