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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소부장 강국이 된 진짜 이유 3가지

경제상식 경제공부/포스트 한일경제전쟁

by 스마트북스 2020. 8. 1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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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특수성? 과연 그게 답일까?

일본은 어떻게 소부장 강국이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그동안의 답은 주로 일본적 특수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전쟁이 일본의 산업 발전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는 시각도 있고, 에도 시대부터 내려오는 장인정신을 체화한 기술자들, 수천 년 전 불상 제작 등에 뿌리를 두고 있는 장수기업 등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존재들의 역할과 역사, 축적의 힘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1970~1980년대 세계 경제를 주름잡은 전자·자동차와 같은 주력산업의 뒷받침, 소니·토요타자동차와 같은 제조 대기업과의 연계와 혁신적 창업자들의 노력을 강조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기존의 답은 일본 소부장 산업의 성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요?
전쟁, 장인정신, 장수기업과 같은 일본적 특수성을 강조하면 일본과 같은 특수한 역사적 경험과 전통이 없는 국가는 산업발전이 어렵다거나, 일본과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세기를 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왜곡된 인식을 불러올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20이라고 불리는 일본 제조업의 성숙 및 쇠퇴과정을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죠. 199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의 침체가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 미흡, 장인정신의 후퇴, 장수기업의 소멸에 원인이 있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일본 경제사회가 역동성보다는 안정성을 선택하고, 도전보다는 안정을 선호하며, 비주류들이 설 자리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전쟁보다는 패전, 역동성이 핵심

전쟁이 일본의 소부장 산업 발전에 우호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군수산업에 뿌리를 둔 대기업 지주회사 체제는 계열사 간 거래 관행으로 이어졌고, 이는 중소기업 간의 경쟁과 혁신을 더디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으니까요. ‘1940년 체제에서 유래한 종신고용 등 일본식 경영방식은 고도성장이 끝난 1990년대부터는 오히려 기업들의 혁신을 저해하는 요인이 됐습니다.
일본 소부장 산업은 패전 이후, 전쟁의 폐허에서 자라났습니다. 일본 근현대사에서 가장 역동적이었던 이 시기에 소부장 산업의 씨앗이 뿌려졌습니다. 역동성의 한 단면을 통계에서도 확인해볼 수 있는데 1955년의 창업률은 20%, 폐업률은 15%2000년대 대비 각각 5, 4배 높았습니다. 한 해에 18만 개 업체가 창업했고, 14만 개가 문을 닫았죠.
패전 후 일본에는 퇴역한 군인, 귀환한 학도병, 실직한 기술자들 넘쳐났습니다. 군수업체의 폐업으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많은 사람이 창업을 택했습니다. 소니1946, 세키스이화학공업1947, 파이오니아1947, 혼다기연공업1948, 오므론1948, 와코루1949, 무라타제작소1950년와 같이 우리 귀에 익은 대기업들이 이때 생겨났습니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소부장 중소기업들도 이 시절에 함께 탄생했습니다. 세계시장 점유율이 90%에 달하는 자동차 배기가스측정장비업체인 호리바제작소는 패전으로 연구를 중단한 교토대 원자 핵물리 공학자가 1953년 창업했습니다. 원자 단위 관찰이 가능한 전자현미경 업체인 일본전자는 해군연구소 출신의 퇴역 장교가 1949년에 세웠죠. 또 오토바이 헬멧으로 유명한 아라이헬멧은 열대용 일본군 군모를 만들던 일본 육군성 군수국의 촉탁 계약직 직원이 1950년 제조법인을 창업했으며, NASA에 카메라 부품을 공급하는 미타카광기는 태평양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학도병이 국립천문대 수리공으로 일하다가 1966년에 창업했습니다. 야광도료 기술은 나치 독일이 일본에 전수한 것으로, 일본 기술자들은 패전 후 1948년 네모토특수화학이라는 전문업체를 세웠죠.

극한에 도전하는 거대과학과의 만남

극한에 도전한다는 공통점이 있는 소부장과 거대과학은 서로 만났을 때 시너지를 발휘합니다. 소부장은 거대과학을 뒷받침하고, 거대과학은 소부장의 혁신을 촉진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패전 후 혼돈 속에서 탄생한 일본 소부장 기업들은 남극탐험대, 우주개발, 스바루 망원경(미국 하와이 마우나케아천문대에 있는 일본국립천문대의 망원경으로 세계 최대 단일 광적외선 망원경으로 유명)과 같은 거대과학 프로젝트에 도전하며, 세계 정상급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오랜 역사와 기술 축적 등 장인정신 및 장수기업이라서가 아니라 극한에 도전한 결과 폭발적 성장을 이루었다는데 더 방점을 찍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 일본 최초의 조립식 주택은 남극탐험을 위해 개발된 것이며 풍력발전기는 남극의 강풍과 혹한을 극복하며 발전했습니다. 1952년 소형 설상차오하라철공소, 1984년 디젤 발전기얀마홀딩스, 1987년 위성 데이터 수신 시스템NEC, 일본전기, 20093만 마력의 디젤 전기추진 쇄빙선히타치제작소 등 많은 기업들이 남극탐험 프로젝트에 참여해서 소부장 기술을 갈고닦았죠.
우주개발과 함께 일본 소부장 기업도 성장했습니다. 일례로 패전 후 솥을 만들던 기타지마시보리제작소는 2012년 최초로 해외 위성을 쏘아올려 일본의 상업용 우주항공 시장을 연 H-IIA 로켓의 첨두 부분을 가공하여 금속 특수가공 분야의 1인자가 되었죠.
또 일본은 광학·소재·가공과 같이 강점을 지니고 있던 산업기술 분야와 천체관측 사업을 연계했습니다. 고배율 관측이 가능해서 많은 천체 관측 성과를 내고 있는 스바루 망원경 곳곳에도 프레팍토, 오카모토광학기공소, 나가세인테그렉스 등 일본 소부장 기업의 기술이 녹아 있습니다.

비주류들: 혁신의 주체

무엇보다 후발주자들의 반란, 괴짜들의 무모한 도전, 사양산업에서의 생존을 위한 모색, 망한 회사를 살리려는 필사적 노력이 없었다면 소부장의 혁신은 불가능했습니다.
한 예로 후루야금속은 귀금속 가공업체로 출발했습니다. 전통적인 귀금속 분야에서는 후발주자로 경쟁이 어렵다고 생각한 후루야는 산업용 귀금속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귀금속을 녹이는 기술을 활용하여 이리듐이라는 특수금속 가공업을 시작한 것이죠. 현재 산업용 이리듐 부문에서 세계시장 점유율의 90%를 차지하고 있으며 삼성전자, LG전자, 중국 최대의 디스플레이 업체인 BOE와 같은 글로벌 기업과 거래하는 강소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100만분의1g 기어를 만든 주켄공업, NASA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푼 미타카광기, 디지털 카메라에 널리 쓰이는 얇고 가볍고 싼 비구면렌즈를 만든 스미다광학글라스 등 수많은 소부장 비주류들은 주류들이 현실에 안주하고 있을 때 신선함과 추진력, 활동성을 무기로 주류를 밀어내며 혁신을 이끌었습니다. 이런 비주류들이 제조업의 한 축을 담당하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이 깊고 넓은 소부장 생태계는 형성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도성장기에 비주류에서 주류로 올라온 일본의 소부장 산업은 이제 다시 한국, 중국과 같은 후발 주자 비주류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고요.

이 포스트는 『포스트 한일경제전쟁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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