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어떤 사건이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미래의 사건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결정론자들은 우주의 초기 조건과 법칙을 알면 미래에 발생할 일을 미리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하죠. 프랑스의 수학자 라플라스는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숙명론자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말 그대로 숙명이라고 생각해요. <케 세라 세라Que sers sers>라는 노래를 우리나라에서는 ‘될 대로 돼라’로도 번역하는데, 진짜 뜻은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다’예요. 하긴 어찌 보면 일어날 일은 어차피 일어날 테니 ‘될 대로 돼라’라고 해석한 것일 수도 있겠죠. 숙명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케 세라 세라’라고 할 수 있어요.
결정론자들은 미래는 과거와의 인과법칙에 의해서 ‘우연히’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반면, 숙명론자들은 인과관계에 의해서인지, 혹은 신의 계시나 우주의 질서, 아니면 그냥 결정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사건이 일어나도록 ‘필연적으로’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 사건은 이미 지나갔고, 현재 사건은 지금 벌어지고 있으며, 미래 사건은 아직 벌어지지 않았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우리의 착각이라고 해요. 과거, 현재, 미래의 사건이 사실은 모두 ‘지금’ 일어나고 있으며,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이 착각이라는 거죠. 시간이 흐르는 것 같지만 흐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을 블록우주이론이라고 해요.
블록우주이론에서 시간은 공간과 비슷한 특징을 가져요. 여기(here)가 특별한 장소가 아닌 것처럼, 지금now도 특별한 시점이 아니라는 거죠. 서울의 민수와 부산의 영희가 통화를 하는데, 민수가 “여기 지금 비가 엄청 와”라고 할 때 ‘여기’는 서울을 말하고, 영희가 “여기는 날씨가 좋은데”라고 할 때 ‘여기’는 부산이죠. 이때 ‘여기’라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뿐이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로마제국 시대에 카이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지금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했어요. 이때 ‘지금’은 기원전49년 1월 10일 어느 순간을 가리키죠. 여러분이 “지금 나는 책을 읽고 있다”고 할 때의 ‘지금’은 현재 여러분이 존재하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22회 카타르 월드컵 결승전에서 심판이 반칙을 한 호나우두에게 “지금 당장 퇴장하라”라고 말한다면, 이 경우 ‘지금’은 2022년 12월 18일 어느 순간을 가리킬 뿐이에요. 위의 3가지 ‘지금’들 사이에 존재론적 차이는 없어요. 여러분이 서울에 가면 민수를 만날 수 있고 부산에 가면 영희를 만날 수 있는 것처럼, 기원전 49년으로 가면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는 것을 볼 수 있고, 2022년으로 가면 카타르 월드컵 경기를 볼 수 있어요. 즉 블록우주이론을 받아들이면, 과거, 현재,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지금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 돼요.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아요. 물론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찬성파와 반대파가 계속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어요.
블록우주이론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요?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럼 다른 비유를 가지고 설명해보죠.
신이 존재한다고 합시다. 신에게 이 세계는 어떻게 보일까요?
신이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을 회상하면서 “아, 그때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하며 과거를 후회할까요? 지금 당신을 내려다보면서 “책을 열심히 보고 있군”이라고 할까요? 아니면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을 떠올리면서 “이번엔 브라질을 우승시켜줄까?”라고 미래를 계획할까요? 신이 과연 이런 식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할까요?
신은 모든 시간과 모든 공간에 존재해요. 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과거, 현재, 미래를 문자 그대로 ‘통째로’ 그 시간,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지각할 거예요. 과거를 후회하고, 현재를 느끼며, 미래를 계획하는 것은 인간이나 하는 짓이지, 신에게는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신이 굳이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 순서를 따져가며 우주의 역사를 관장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만약 여러분이 과학적 인과관계를 철저하게 믿는다면 결정론자일 것이고, 타로점이나 사주팔자를 믿는다면 숙명론자일 가능성이 크겠죠. 그리고 영화 <인터스텔라>에서와 같이 미래의 아버지가 현재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블록우주론자일 것입니다. 이 글을 읽고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나요?
이 포스트는 『5분 뚝딱 철학 : 생각의 역사』(김필영)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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