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수송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의 전범 재판에서 상부에서 맡긴 임무를 충실히 했을 뿐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재판을 참관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유죄인데 ‘생각의 무능’이 그 이유라고 했지요.
아이히만이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걸까요? 나름 엄청나게 생각이 많지는 않았을까요? 그러면 뭐가 문제였을까요? 바로 거꾸로 생각한 것이에요.
아이히만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어요. 그것은 유럽 전역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한곳으로 모으고, 기차에 태워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송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어떻게?’ 하면 그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었죠.
당시에 독일군이 차지한 지역에 놓인 철도의 길이는 약 17만 킬로미터이고, 철도 공무원만 50만 명, 철도 관련 노동자만 90만 명이었어요. 어마어마한 규모죠. 그러니 철도 시간표를 짜고 시간에 맞추어 유대인들을 환승시키는 것은 몹시 복잡한 일이었을 거예요. 나중에 아이히만이 회고하기를 당시 열차 시간표를 짜는 일은 과학 그 자체였다고 해요. 열차 시간을 효율적으로 맞추고, 유대인들에게 일종의 바코드를 심어서 관리하고, 나중에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아예 열차 안에 가스실을 만들었어요. 아무튼 업무 측면만 보면 아이히만은 유능한 관리였어요.
그런데 아이히만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어요. 자신이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예요.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의 저자이자 유명한 강연자인 사이먼 사이넥(1973~)은 이것이 문제라고 말해요. 우리는 대부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아요.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하면 잘할지 생각하고 연구해요. 그런데 ‘왜’ 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죠.
훌륭한 리더는 생각을 거꾸로 한다고 합니다. 먼저 ‘왜Why’를 묻고, 그러한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How’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무엇을What’ 해야 할지를 고민해요. 사이먼 사이넥은 이것을 골든 서클Golden Circle이라고 합니다.
1900년 초반 미국에서는 비행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이 한창이었는데 모두 실패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미국 하버드대학의 항공 분야 최고 권위자인 랭글리라는 사람이 무인 비행에 성공했어요. 그러자 미국 국방부에서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고, 그는 최고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모아 유인 비행 연구팀을 짰어요. 언론은 랭글리가 언제 유인 비행에 성공할지 계속 보도했죠. 그런데 시험 비행이 계속 실패했지요
그사이 최초의 유인 비행에 성공한 인물은 뜻밖에도 오하이오주의 시골 마을에 살던 자전거 수리공들이었어요. 라이트 형제는 대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자금도 없었고 언론의 관심도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들이 먼저 유인 비행에 성공한 거예요. 라이트 형제가 유인 비행에 성공하자 랭글리는 비행 프로젝트를 바로 중단해버렸어요. 라이트 형제는 어떻게 비행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사이먼 사이넥에 따르면, 라이트 형제는 ‘왜’라는 질문에 확실한 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계 최초로 유인 비행기 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그들에게는 비행에 성공하면 인류에게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는 꿈이 있었어요. 비행 자체가 목적, 동기, 가치, 이유였기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러 시도를 할 수 있었죠. 하지만 랭글리의 목적은 돈과 명예였어요. 물론 돈이나 명예가 가치가 없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것도 사람에 따라서 좋은 가치가 될 수 있어요. 하지만 핵심은 랭글리에게 비행의 성공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거예요. 랭글리도 “나는 왜 비행기를 개발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먼저 답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어요.
왜‘ ’라는 질문을 한번 던져볼게요.
왜 아침마다 일어나죠?
왜 이 책을 보고 있죠?
왜 회사에 나가죠?
왜 그토록 공부를 열심히 하죠?
왜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죠?
왜 타인들과 어울리죠?
왜 여행을 떠나죠?
왜 사회적 규범을 지키죠?
물론 이 질문에 모두 답할 필요는 없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행위를 ‘그냥’ 해요. 나중에 누군가 “너 왜 그렇게 했니?”라고 물으면 그제야 이러저러한 이유를 들어요. 그런데 ‘왜?’라는 질문을 먼저 하게 되면, 우리가 하는 행위의 많은 부분들이 바뀔 수 있을 거예요.
이 포스트는 『5분 뚝딱 철학 : 생각의 역사』(김필영)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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