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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가 이긴 건 까마귀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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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 최강 카르타고 해군

당시 카르타고 해군은 지중해 최강이었습니다. 카르타고는 인공항까지 만들 정도로 해군력 증강에 과감한 투자를 해왔죠. 당시는 3단 노선이 주력이었던 시대가 저물고 다단 노선이 새로이 등장했는데, 5단 노선은 기본이고 심지어 16단 노선까지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다단’이라고 해서 반드시 노가 여러 층으로 설치된 것은 아닙니다. 노선의 수는 노를 설치하는 층수로 세기도 했지만, 하나의 노를 몇 명이 젓는가를 기준으로 세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상하 2열로 노가 배치되어 있어도 이를 젓는 인원이 다섯 명이면 5단 노선입니다. 카르타고의 함선은 로마군의 함선보다 속도가 빨랐습니다. 하지만 선상에 소수의 병력만 배치할 수 있었고, 추가된 무기도 없었죠.

 

로마군의 까마귀

로마군의 함선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대신 배의 크기는 커지고 갑판의 넓이도 넓어졌습니다. 따라서 로마 함선은 대형 쇠뇌인 ‘발리스타’나 투석기를 배에 탑재하기 시작합니다. 다만 이런 무기들은 배를 격침시킬 정도까지는 못 되었고, 적함의 노꾼들이나 갑판 위 병사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이때의 주 전술도 여전히 충각 돌격이나 선상 백병전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갈고리 달린 밧줄을 적선에 걸거나, 혹은 충각을 들이받은 상태에서만 적의 배로 건너가 백병전이 가능했지만, 이마저도 높은 파도로 인해 이따금 두 배가 분리되곤 해 선상 백병전을 즐겨하던 로마군은 이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로마군은 ‘코르부스Corvus’ 즉 까마귀라는 특수한 장치를 개발합니다. 까마귀는 배의 갑판 위에 장착되는 가교의 일종입니다. 길이 11미터, 넓이 약 1.2미터의 목재 가교 끝에는 쇠로 된 무거운 스파이크가 달려 있었습니다. 이 까마귀를 도르래로 조종해 적 함선에 걸친 다음, 이를 통해 배 위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적함으로 쉽게 건너가 백병전을 벌일 수 있었죠.

BC 260년 밀라이 해전에서 로마군은 까마귀를 처음 사용해 대대적인 전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까마귀 자체가 무척 무거웠기 때문에 배의 기동에 지장을 주었고, 까마귀를 들어올린 상태에서 바람이 불거나 파도가 높아지면 자칫 배가 뒤집힐 위험마저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군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로마군이 최강의 카르타고 해군을 상대하려면 까마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죠.

 

1차 포에니 전쟁

BC 3세기경,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해상무역강국으로 일어설 때까지, 로마는 이탈리아반도에서의 전쟁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일단 내부적인 전쟁을 마무리하고 눈을 카르타고로 돌렸는데, 갈수록 카르타고의 해군이 만만찮게 성장하는 것을 로마는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죠. 카르타고군의 주력 함선은 해상무역강국답게 5단 노선이었는데, 막강한 해군력으로 지중해 일대의 제해권을 확실히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이에 로마군은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신무기인 코르부스를 이용해 적의 함선으로 건너가 백병전을 실시하는 전법으로 카르타고군과 대결하기로 결심합니다. 더욱이 로마군은 전투병이 까마귀를 건너는 동안에도 뱃전에서 투창과 발리스타대형 쇠뇌로 공격할 수 있는 시스템도 동시에 준비했습니다. 사실 카르타고군의 함선은 로마군 함선보다 속도가 빨랐지만, 군선이라기보다는 무역선에 가까웠습니다. 그들이 벌였던 전투란 것도 정규군과 의 싸움이 아닌 해적 소탕 정도였기 때문에 로마의 정규 해군과 붙었을 경우 과연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웠죠. 선상에서 백병전을 벌일 병력도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반면 로마군은 함선 한 척에 전투병력만 50~100명이 탑승해 카르타고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로마 승리 주역, 까마귀

1차 포에니 전쟁은 주로 해전이었고, BC 260년부터 BC 241년까지 다섯 차례의 해전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해전에서 로마군은 5전 5승, 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역시 까마귀라는 신무기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때 승리감에 도취된 로마군이 무모한 상륙전을 감행해 전멸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고, 폭풍우에 함대 전체가 거의 궤멸당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카르타고는 해전에서 워낙 참패했던지라 이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결국 로마에게 지중해 제해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도 1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에게 완전항복이 아닌 불리한 종전 정도로 끝났습니다. 시칠리아에서 확보한 영토의 양도와 배상금, 그리고 사르데냐와 코르시카까지 양도를 골자로 한 협상조건은 로마로서는 꽤 만족스러운 성과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어마어마한 부자였던 카르타고 입장에서는 ‘응, 쬐끔 부담스럽네?’ 정도였죠. 심지어 별도로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고도 카르타고는 배상금 전액을 지불했습니다.

이 포스트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리터리 세계사 1. 고대편』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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