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에서 방송된 프로그램 중 <골든 볼즈>라는 게 있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네 명의 참가자가 거액의 상금을 두고 경쟁을 벌인다. 한바탕 암투가 지나고 나면, 두 명은 탈락하고 나머지 두 명이 결승전을 벌인다. 결승전 규칙은 다음과 같다. 진행자가 두 명의 참가자에게 각각 두 개의 공을 준다. 하나는 ‘나눔’(SPRIT)라고 쓴 공이고 다른 하나는 ‘독점’(STEAL)이라고 쓴 공이다. 자신이 선택하고 싶은 방법이 적힌 공을 내밀면 된다.
두 명의 참가자는 공을 선택하기 전에 서로 상의한다. 그리고 상의가 끝나면 동시에 공을 내민다. 만약 두 사람이 동시에 ‘나눔’을 선택하면 상금을 나눠 가진다. 둘 중 한 사람만이 ‘독점’이라고 쓴 공을 내밀면 상금을 독차지할 수 있다. 만약 두 사람 다 ‘독점’이라고 쓴 공을 내밀면 둘 다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게임이 종료된다.
공을 선택하기 전 두 사람이 상의하는 모습이 모두 방송으로 나가는데, 이는 시청자들의 흥미를 돋우기도 하지만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보통 참가자 둘이 상의할 때, 누구도 내가 다 갖고 싶다고 말하지 못한다. 모두 ‘나눔’을 선택하겠다고 말한다. 그것도 매우 진정성 있는 태도로. 하지만 잠시 후 변수가 생긴다. 둘 중 한 명이 갑자기 약속을 깨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상금은 배신자가 독차지하게 된다.
<골든 볼즈> 방송분 중 가장 화제가 된 결승전 진출자 닉과 이브라힘 이야기이다.
결승전에 진출한 이브라힘은 자신도 나눔을 낼 테니, 닉도 나눔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닉, 우리가 관객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뭘까? 사람들에게 믿음의 힘을 보여주자. 찬란하게 빛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자.”
이브라힘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아버지에게 들은 정직의 가르침을 전했다. 사랑과 온기와 희망을 담고 있는, 지금까지 들었던 어떤 미담보다 격조 있는 이야기였고 방청객들은 감동했다.
이제 방청객들의 불타오르는 시선은 닉에게 꽂혔다. 닉이 입을 열었다. “나는 ‘독점’을 선택하겠어!”
그 순간 스튜디오의 방청객들은 물론 시청자들 모두 흥분하기 시작했다.
희망의 분위기를 한순간에 처참히 무너뜨리다니. 사람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뻔뻔스러운 거지?
닉의 선택에 가장 경악한 것은 이브라힘이었다.
닉이 말했다. “내가 ‘독점’을 선택한 건 널 놀리기 위해서야, 이브라힘. 너에게 지지 않기 위해서.”
그러고는 덧붙였다. 이브라힘이 약속대로 ‘나눔’을 내고 자신이 ‘독점’을 내서 상금을 독차지하게 되면 이브라힘에게 반을 주겠다고. 도대체 누가 그 약속을 믿겠는가? '독점;을 선택한 사람인데!
닉이 ‘독점’을 선택하겠다고 말했을 때 이브라힘에게는 이미 선택권이 없었다. 만약 이브라힘이 마음을 바꿔 ‘독점’을 선택한다면 규정상 두 사람 모두 한 푼도 갖지 못할 터였다. 닉의 결정에 화가 나서 ‘독점’을 선택했을지 모른다는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이브라힘은 ‘나눔’을 선택했다. 이제 돈은 전부 닉의 차지가 될 터이다. 닉은 과연 약속을 지켜 이브라힘에게 상금의 절반을 줄까?
결과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닉은 ’독점’ 대신 ‘나눔’을 선택했던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는 가운데 둘은 돈을 공평하게 나눠 가졌다.
진짜로 좋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지만 사람들을 진짜 놀라게 한 것은 방송이 끝난 뒤에 일어났다. 프로그램 관계자가 이브라힘의 아버지 사연에 흥미가 생겨 취재하러 갔다가 매우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브라힘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와 살았고, 아버지를 만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방송에서 사람들을 감동시킨 아버지의 교훈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브라힘은 영화에서 본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닉을 구슬리는 데 써먹었으며, 닉을 감동시켜 ‘나눔’을 선택하게 만든 후 자신은 ‘독점’을 선택해 상금을 독점하려는 계획이었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프로그램 관계자는 황당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진실한 척하더니, 거짓말쟁이가 여기 있었네!”
그러나 닉은 이브라힘의 연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고, 이브라힘은 시청자들의 압박으로 악역을 포기하고 끝까지 좋은 사람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닉 역시 좋은 사람으로 남았다.
BBC의 <골든 볼즈>는 여러 시즌이 방송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 되면 돈을 모조리 잃고, 나쁜 사람이 되면 돈은 가질 수 있을지 몰라도 얼굴이 깎였다.
이 프로그램은 전형적인 현대의 자화상이다. 참가자들이 서로 모여 한 팀이 된다. 서로 믿을 만한 구석이 전혀 없으니 이익을 위해 서열이 만들어진다. 그러다 누군가 배신을 하면 자신의 처지가 비참해진다.
내가 먼저 배신을 시도하다가는 속이 좁다고 지적받는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에 갇혀 고통을 감내한다.
지혜가 결핍된 호인(好人)은 나약하고 무능한 사람의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골든 볼즈>는 너무도 솔직하고 잔인했다. 인간사회의 경쟁의 실상을 말해주고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파국으로 치닫지 않도록 모색하게 해준다.
돈 버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이 사회 게임의 법칙에 대한 이해도가 낮을 것이다. 게임의 법칙이란 인성의 ‘악’을 믿는지, ‘선’을 믿는지에 대한 것이다. 인간의 선함을 믿는 사람은 인생의 패자일 경우가 많다. 타인을 믿고 내 운명까지 맡겼건만 속아 넘어가는 일도 흔하다. 인간의 악함을 믿는 사람은 종종 패자보다 더 비참하다. 타인을 믿지 않기에 타인에게 믿음을 얻지도 못한다. 그래서 언제나 초조하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나쁜 놈으로 보는 탓에 사람들과의 소통이나 협력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선해도 지고 악해도 지는 거라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있는 걸까?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최고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좋은 사람이란 곧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다. 머리가 나쁘면 사람들에게 농락당하기 십상이므로 머리도 좋은 사람이다.
이 포스트는 『그럼에도 사는 게 쉽지 않을 때』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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