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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없는 시대, 로맨스를 꿈꾸는 당신에게

인문 교양 읽기/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by 스마트북스 2018. 7. 16.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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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없는 시대, 로맨스를 꿈꾸는 당신에게

사랑과 저주, 다른 듯 같은 마법

 

사랑에 빠졌을 때를 우리는 흔히 마법에 걸린 상태에 비유하곤 한다. 이성이 마비되며 한 사람에게 눈이 멀어서 마치 마법에 걸린듯하기에 그런 말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마법에 걸린 사람이 있다. 야수의 몸에 갇힌 한 왕자.
사랑에 빠진 마법과 저주에 걸린 마법은 그 양상이 다르다.
사랑의 마법에 빠졌을 때 우리는 눈이 어두워져 상대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반면 저주의 마법에 갇혔을 때는 우리의 본질이 가리어져 타인이 나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마법이라는 공통분모는 있으나 사랑과 저주라는 다른 축을 가진 두 개의 마법이 충돌한다.
저주의 마법에 갇힌 이는 타인의 사랑을 받아야 풀려난다.
그런데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사랑의 마법은 눈을 멀게 한다. 그러나 사랑의 마법은 마법일 뿐, 사랑이 아니다. 깨야 하는 것은 저주의 마법뿐만이 아니다. 사랑의 마법도 깨야 한다.

저주의 마법

동화 속 왕자와 공주는 내면의 빛나는 선한 본성을 표현한다. 인간 내면의 가장 좋은 모습이 바로 왕자와 공주라는 상징으로 이야기 속에 그려진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 가장 좋은 한 사람의 실체가 야수라는 껍질에 가려져 있다. 흉측한 외모 아래 빛나는 본질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서로의 속마음을 알 수 없기에 겉모습과 실체를 종종 혼동한다. 그러나 동화에서 겉모습은 내면을 철저히 반영한다. 흉측한 외모의 야수는 뒤틀리고 삐뚤어진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빛나는 품성인 왕자의 모습이 내면에 숨겨져 있다고 해도 어두운 면이 장악해버린 한 인간의 진실이 동화에서는 고스란히 외모로 묘사된다. 삐뚤어지고 뒤틀렸기에 왕자, 즉 야수는 외롭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기적인 거인에서 거인의 내면 풍경을 그의 정원에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수의 성은 한 사람의 오롯한 내면 풍경이다. 그는 재물과 지위를 모두 가지고도 영원한 고독에 갇혀 있다.
야수가 걸린 마법은 아주 처절하다. 누군가의 사랑을 얻어야 풀리는 마법이다. 이 저주가 끔찍한 이유는 사랑을 받는다는 건 사랑할 줄 알아야 도달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오래, 괴롭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것인가 궁구하던 영혼은 뷰티를 앞에 두고 그 비밀을 푼다.
사랑하기에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진정 사랑하는 법을 알고서야, 드디어 여자에게서 사랑의 선언을 듣고 마법에서 풀려난다. 사랑받으라는 저주는 사랑을 해야 깨질 수 있는 저주였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된다. 사랑받으라는 저주가 사랑할 수 있다는 축복으로 바뀌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사랑의 마법

아버지의 착한 딸 뷰티로 산다는 건, 사회문화적 가치에 그대로 순응하는 어린 아가씨로 산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회가 요구하는 미덕에 아무런 의문도 없이 순응하는 여자들은 사랑에 대한 가치도 사회에서 말하는 대로 받아들인다. 순결하고 거룩한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정숙함을 지키고 희생과 양보를 체화한다. 그러기에 로맨스라는 환상으로 채색된 길을 생각 없이 총총 걸어서 한 남자에게 종속되는 삶에 갇히고서야 마법에서 깨어난다.
사랑의 마법에 눈이 머는 것은 로맨스라는 환상에 자신을 팔아넘길 때 가능하다. 이성이 마비되며 스스로 도취되어 실체에 대한 환상에 빠진다. 그렇기에 착하고 순종적이며 사랑과 희생의 대명사인 뷰티는 어느 남자를 만나더라도 사랑의 마법에 걸리고야 마는 여자이다.
가장 강성인 페미니스트 여성도 마지막까지 벗어나기가 힘든 것이 로맨스의 사슬이다. 하물며 착한 아버지의 딸이 존재의 기반인 여자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니까 뷰티는 사랑의 마법에 걸려 환멸을 맞이하는 운명에 갇힌 여자이다    

장미는 왜 소중한가

장미는 불멸의 사랑을 뜻한다. 겉모습이라는 마법, 로맨스라는 마법을 넘어서 닿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 야수는 다른 것은 넘치도록 풍성하지만, 고독 속에 사랑만은  없기에 장미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꽃잎이 일곱 개인 장미는 완벽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천국으로 올라간 단테가 장미의 방에서 그리도 염원하고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여기서 장미는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의 상징이다.
장미는 아름다움의 본질이기도 하다. 뷰티가 아버지에게 갖다달라고 부탁한 것은 온갖 금은보화가 아니라 장미 한 송이이다.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을 원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린 아가씨인 뷰티가 눈먼 사랑의 마법에서 벗어날 힘이기도 하다. 처음에 뷰티는 성안의 음악, , 정원 등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들에 끌리지만, 이윽고 야수의 거죽을 꿰뚫고 그의 선하고 빛나는 본질을 보아준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

2014년에 개봉한 프랑스 영화 <미녀와 야수>는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보다 원작에 충실하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벨(불어로 뷰티)은 야수의 성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말의 귀에 마법의 말을 속삭여야 한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Plus que toutau monde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반쪽짜리이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다음에 더욱 어떠어떠한 무엇 혹은 누구라는 말이 빠져 있다. 빠진 반쪽을 채우는 것은 말을 달리게 하는 자의 몫이다.
드디어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가 세상 그 어느 것보다다음에 소중한 당신을 채워넣는 마음으로 야수에게 달려올 때 사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야수가 사랑을 얻기 위해 여자를 떠나보내는 것을 감수해야만 했다는 점이다. 여자를 잃을지라도, 그게 그녀가 원하는 바라면 그것조차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이야말로, 벗어나고 싶었던 영원한 고독조차 감수하겠노라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인 것이다. 남자는 그 사랑으로 반쪽짜리 소원을 담아 여자를 보내준다. 여자가 나머지 반쪽의 주문을 찾아 채워 자신에게 돌아와주기 바라면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산다. 로맨스라는 마법에서 눈을 떠서, 누군가 걸치고 있는 겉모습 안에 도사리고 있는 본질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 사랑을 찾지 못한다.
혹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혹은 누구인지 받아들일 수 없어서 사랑을 못하는 수도 있다.
누군가 혹은 무엇이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소중한 대상이 된다는 건, 그 대상을 위해 나를 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지 못하니까 사랑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을 줄도 모르면서 사랑이 없다 사랑받고 싶다라며 끝도 없는 사랑 타령으로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녀와 야수 | Beauty and the Beast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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