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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를 다 가지지 못하는 슬픔에 대하여

인문 교양 읽기/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by 스마트북스 2018. 7. 1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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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를 다 가지지 못하는 슬픔에 대하여

두 개의 구멍 중 하나

인어공주 이야기는 사람이 두 개의 구멍으로 환원되는 이야기이다. 여자의 신체에 있는 두 개의 구멍, 즉 입과 아랫도리의 구멍. 이 두 개의 구멍을 두고 어찌하지를 못해 길들이고 지배하려는 남자들의 권력이 개입되면, 슬픈 인어공주들이 태어나 의미 없는 물거품으로 사라져간다.
인어공주가 혀를 내주고 얻은 것이 과연 다리뿐이라고 생각하나? 아니, 인간 남자의 배필이 되기 위해서는 다리 사이의 구멍이 필요하다. 그걸 얻기 위해 인어공주는 목소리를 내준다. 즉 위쪽의 구멍을 틀어막아 얻는다.
가부장 사회는 여자가 두 개의 구멍을 다 가지고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말을 하고 싶은가? 그러면 하반신의 구멍이 없는 물고기 하체를 입으면 된다. 그러나 남자의 파트너가 되어 그에게 사랑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혀를 내주고 다리 사이의 구멍을 얻으면 된다. 그렇게 하나의 존재는 두 개의 구멍으로 환원된다. 온전히 구멍 두 개를 다 쓰며 살 수 없다. 버젓이 쓰라고 달린 두 개 중 하나만 쓸 수 있다.


SNS에서 남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두 개 중 하나를 택하세요. 상반신이 물고기이고 인간의 하체를 가진 여자와 상반신은 인간이고 하반신은 물고기인 여자, 어떤 쪽을 택하실래요?
주의: 전자는 입을 뻐끔거릴 뿐 소리는 내지 못하나 다리 등은 멀쩡히 있고, 후자는 여자의 얼굴과 젖가슴과 머리카락은 있고 말도 하고 눈도 맞추지만 다리 등이 없어 동침할 수 없습니다.”

이 질문에 인간 남자들은 치를 떨면서 어떻게 그렇게 발칙하고 외람된 질문을 할 수 있느냐며, 다들 하나같이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상반신이 여자이고 하반신이 물고기인 쪽을 택했다.
왜 치를 떠는지 의아했다. 물고기로 형상화해서 물어보면 그리도 치를 떨면서, 왜 같은 사람에게 물고기처럼 입을 다물라고 하는가 싶어서.
환원시키다는 영어로 ‘reduce’이다. 이는 줄여버린다는 뜻이다. ‘말하는 물고기 하반신으로 살래, 말은 못하나 사람 다리로 살래?’라는 두 가지 중 달랑 하나를 선택하고 남는 삶이란, 지성과 감정과 영혼과 육체, 이 모든 것을 갖춘 전적인 존재whole being임을 부인당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고통보다 더 슬픈 건

왕자가 인어공주를 주워서(?) 예쁜 옷을 입히고 먹이고 데리고 다니며 쳐다보며 예쁘다, 예쁘다 해주고 쓰다듬어주는 동안, 인어공주가 겉으로는 방긋거리며 웃되 속으로 혼자 참아야 하는 고통이 매 걸음걸음마다 칼에 찔리는 고통으로 묘사된다.
여자는 먹여 살려주는 사람이 있어서 얼마나 편하게 사는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되묻고 싶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니 너는 말은 하지 말고 인형처럼 방싯거리며 춤추라면 추며 사는 삶이 걸음 하나하나마다 칼에 찔리는 고통이라고 한다면, 차마 더 낫다고 할 수 있는가 말이지.
그러나 이 모든 고통보다 더 슬픈 건, 인어공주가 원하는 것이 단지 왕자의 눈에 들어 예쁨을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공주가 원한 것은 왕자의 진실한 사랑을 받아 그 영혼의 일부를 받고 불멸의 영혼을 얻는 일이었다. 감히 진실한 사랑을 꿈꾸고, 감히 하늘 높이 반짝거리는 별들 사이로 날아올라가 이 세계를 초월하기를 꿈꾸었던 것이 가장 슬프다.
겉으로 보이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추구하는 여자에게 겉모습이 주는 그 이미지에만 갇혀서 살라고 하는 것은 걸음마다 칼에 찔리는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차피 발걸음을 뗄 때마다 아플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선택한 일이 아니었던가. 감수하겠다고 했던 고통이 아니던가.

말할 수 있어도 혀 잘린 심정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들을 움직인다는 말은 궁극적으로는 진실이긴 하다. 그래서 인어공주는 보이지 않아 아무도 몰라줄 테지만 공기의 요정이 되어 불멸의 영혼을 얻는 길을 걷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궁극적인 차원 말고, 현실의 이 피상적인 차원에서는 항상 보이는 것이 지배한다. 우리는 모두 외모와 배경이 주는 그 이미지에 갇혀 있으니까. 그리고 처음 관심을 끌어오는 것은 그런 겉모습들이 맞다. 바다의 마녀가 아름다운 몸과 걸음걸이 그리고 호소하는 눈이 있으니 왕자에게 다가갈 수 있을 거라는 말은 그래서 맞다. 관심은 끌 수 있다. 옆에서 맴돌 수는 있다. 그러나 인지를 가진 존재로 태어나 진실한 관계를 통해 불멸을 이룰 수 있을 거라 믿는 존재에게 사랑하는 상대가 나를 궁구히 탐색해올 때 오로지 겉모습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은 칼에 찔리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더 슬픈 건 겉모습은 언제나 그르치게 사람을 이끈다. 왕자의 목숨을 정말로 구한 것이 인어공주일지라도 왕자는 모르지 않는가.
목소리가 있어도 진심이 다 전달되지는 않는다. 언어란 참으로 불완전한 수단이라서 공기라는 매질 속으로 내뱉어진 순간, 말하는 이의 의도를 듣는 이가 그대로 알아주는 법이 거의 없다. 더구나 화성 출신이라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금성 출신들의 말을 이해하기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말을 할 줄 알아도, 더군다나 말을 제법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살아도,
나는 정작 그 한 사람 앞에서는 혀가 잘린 인어공주 같은 심정일 때가 많다. 그런 슬픔으로 인어공주와 같이 울었으면 나도 바다 하나 가득 채워 그 안에 성을 지을 만큼은 울었을 거라고 엄청난 과장법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사랑, 어디까지나 나의 사랑은

사랑에 여러 번 실패했다. 자랑이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다. 다 값진 경험이었다. 영혼의 그릇은 찢어져야 넓어진다고, 찢어지는 그 고통을 감수하겠느냐고 내게 물어왔던 목소리가 있었다. ‘라고 대답한 순간, 많은 실패와 아픔으로 점철된 운명에 나를 가둔 것이 아닐까? 그래도 고통이 반짝이는 보석을 낳았다면 그걸로 되었다 싶다.
인어공주의 모습에 감정을 이입해서 죽 읽다가 그 허망한 결말에 가슴이 아파서 울기도 하지만, 추스리고 곰곰 생각해보면 결국 다다르는 깨달음은 이 결말이 오히려 현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사랑을 받기위해 저렇게 절실해야 하는 것이 여자의 본질일까 하는 의문이 나를 괴롭혔다. 사랑 때문에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꾸며 보여주면서 스스로 갇혀서 아파하는 건 아니고? 내게 다른 옵션은 없던가? 이 모든 게 내 진짜 모습을 봐주지 않고 나를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 안에 가두는 상대 탓일까? 내 삶을 극적으로 바꾸어 사랑받아 충만한 존재로 만들어줄 결정적인 그 한 사람이라는 이미지에 내가 상대를 가두는 것은 아니고?
상대에게 나의 기대와 욕망과 환상으로 같은 짓, 즉 이미지에 가두는 짓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닫는 지점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남녀를 불문하고 다 사랑받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사랑을 하는 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내가 먼저 하지 않는다면. 인어공주는 마지막에 왕자를 죽이지 못하고 바다로 뛰어들어 바다 거품으로 스러져가기를 택한다. 이 순간이 바로 사랑을 받고자 다른 존재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올려다만 보다가 비로소 내가 당신을 사랑해라고 결단을 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타인을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이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존중해준다는 게 아니던가.
가슴은 아프지만, 사랑의 완성이 꼭 두 사람의 결합은 아니다. 인어공주가 하는 사랑은 오히려 왕자를 놓아주고 자신이 죽는 방법을 택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그리고 가장 원하던 불멸의 영혼도 얻게 되지 않았는가.
사랑의 완성이 비단 두 사람의 결합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아주 많이 넓어진다. 그리고 이 피상적인 현실을 넘어선 가치를 발견하고는 목적이 이끌고 가는 삶이 완성된다.
그렇다면 혼자이든 둘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사람들의 더위를 식혀주고 달래주는 공기의 요정으로 그 소명은 소중한 일이 아니던가. 그렇게
사랑은 어디까지나 한 사람이 하는 것이다. 사랑의 완성도 옆에 상대가 있든 없든 한 사람 내에서 이루어진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한

안데르센은 사랑에 실패하고 이 이야기를 썼다. 인어공주의 입장에 사랑받는 것에 실패한 안데르센의 시각이 녹아들었다고 볼 수 있다. 실패한 사랑을 펜 끝에서 완성한 이야기인 것이다.
사람들은 지나간 일에 대해 늘 변명을 한다. 특히 망가진 관계에 대해서 많이들 변명한다. 하지만 그 변명이 상대에 대한 비난이 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지는 그런 못난 짓이 아니라, ‘
그대를 사랑해서 내가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 틈으로 당신을 사랑한 내 사랑을 보냅니다가 된다면, 실패한 사랑 이야기도 완성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사람은 참으로 미우면서도 또 사랑스러운 존재인 것 같다.
상처를 주고, 자가당착에 빠지고, 자기 세계에 갇혀서 자기 말만 하고, 이기적이고, 때로는 몰인정한 모습에 참으로 밉고 또 밉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이면에 자리한 미욱함, 그리고 어리석음을 보게 된다. 더 나아가 내 속에서 바로 그 미욱함과 어리석음을 발견하며 통탄하는 단계를 거친다.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저 하늘의 별들을 보는 모습을 보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까.
사랑을 거절하고 떠난 상대가 밉지만, 그러다가도 여전히 그 사람은 사랑스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심해의 바닥을 바라보며 사는 게 아니라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사는 한은. 인어공주 | The Little Mermaid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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