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빠졌을 때를 우리는 흔히 마법에 걸린 상태에 비유하곤 한다. 이성이 마비되며 한 사람에게 눈이 멀어서 마치 ‘마법에 걸린’ 듯하기에 그런 말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에 마법에 걸린 사람이 있다. 야수의 몸에 갇힌 한 왕자.
사랑에 빠진 마법과 저주에 걸린 마법은 그 양상이 다르다.
사랑의 마법에 빠졌을 때 우리는 눈이 어두워져 상대의 본질을 보지 못한다. 반면 저주의 마법에 갇혔을 때는 우리의 본질이 가리어져 타인이 나의 본질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딜레마가 생긴다. 마법이라는 공통분모는 있으나 사랑과 저주라는 다른 축을 가진 두 개의 마법이 충돌한다.
저주의 마법에 갇힌 이는 타인의 사랑을 받아야 풀려난다.
그런데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지 못하면서 어떻게 타인의 사랑을 받을 것인가. 사랑의 마법은 눈을 멀게 한다. 그러나 사랑의 마법은 마법일 뿐, 사랑이 아니다. 깨야 하는 것은 저주의 마법뿐만이 아니다. 사랑의 마법도 깨야 한다.
동화 속 왕자와 공주는 내면의 빛나는 선한 본성을 표현한다. 인간 내면의 가장 좋은 모습이 바로 왕자와 공주라는 상징으로 이야기 속에 그려진다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 가장 좋은 한 사람의 실체가 야수라는 껍질에 가려져 있다. 흉측한 외모 아래 빛나는 본질이 가려져 있는 것이다.
현실에서 인간은 서로의 속마음을 알 수 없기에 겉모습과 실체를 종종 혼동한다. 그러나 동화에서 겉모습은 내면을 철저히 반영한다. 흉측한 외모의 야수는 뒤틀리고 삐뚤어진 내면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아무리 빛나는 품성인 왕자의 모습이 내면에 숨겨져 있다고 해도 어두운 면이 장악해버린 한 인간의 진실이 동화에서는 고스란히 외모로 묘사된다. 삐뚤어지고 뒤틀렸기에 왕자, 즉 야수는 외롭다.
오스카 와일드의 「이기적인 거인」에서 거인의 내면 풍경을 그의 정원에 고스란히 재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야수의 성은 한 사람의 오롯한 내면 풍경이다. 그는 재물과 지위를 모두 가지고도 영원한 고독에 갇혀 있다.
야수가 걸린 마법은 아주 처절하다. 누군가의 사랑을 얻어야 풀리는 마법이다. 이 저주가 끔찍한 이유는 사랑을 받는다는 건 사랑할 줄 알아야 도달하는 경지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도 오래, 괴롭게 어떻게 하면 사랑을 받을 것인가 궁구하던 영혼은 뷰티를 앞에 두고 그 비밀을 푼다. 사랑하기에 자신을 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진정 사랑하는 법을 알고서야, 드디어 여자에게서 사랑의 선언을 듣고 마법에서 풀려난다. 사랑받으라는 저주는 사랑을 해야 깨질 수 있는 저주였다는 걸 그렇게 알게 된다. 사랑받으라는 저주가 사랑할 수 있다는 축복으로 바뀌는 마법이었던 것이다.
장미는 불멸의 사랑을 뜻한다. 겉모습이라는 마법, 로맨스라는 마법을 넘어서 닿을 수 있는 진실한 사랑을 상징한다. 그래서 야수는 다른 것은 넘치도록 풍성하지만, 고독 속에 사랑만은 없기에 장미가 그토록 소중한 것이다. 꽃잎이 일곱 개인 장미는 완벽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단테의 「신곡」에서는 천국으로 올라간 단테가 ‘장미의 방’에서 그리도 염원하고 그리던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여기서 장미는 순수하고 완전한 사랑의 상징이다.
장미는 아름다움의 본질이기도 하다. 뷰티가 아버지에게 갖다달라고 부탁한 것은 온갖 금은보화가 아니라 장미 한 송이이다. 소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을 원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어린 아가씨인 뷰티가 눈먼 사랑의 마법에서 벗어날 힘이기도 하다. 처음에 뷰티는 성안의 음악, 책, 정원 등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들에 끌리지만, 이윽고 야수의 거죽을 꿰뚫고 그의 선하고 빛나는 본질을 보아준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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