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왕은 괴물의 습격에 속수무책이다.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젊은이가 필요하다. 이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처럼 늙고 정체된 자신을 버리고 새롭고 젊은 자신으로 거듭나야 일상에 틈입해 들어오는 괴물과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소리이다. 괴물 그렌델은 인간들이 애써 만든 문명을 부수고, 그 질서를 파괴하고자 하는 동물적인 본능을 상징한다. 베오울프는 이 그렌델과 밤새 싸워 그 팔을 뽑아 죽인다. 밤은 바로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 올라오는 때를 일컬으니, 인간이 자신 내부의 어두운 본성과 사투를 벌이는 때가 밤인 것은 당연하다.
그렌델을 죽일 때 심장을 찔러 죽이는 것도 아니고, 다리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팔을 뽑아 죽였다는 데에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심장은 본질을 상징한다. 인간 내부의 동물적인 본성을 그 본질까지 찔러 들어가 죽이고 깔끔히 청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심장을 찔러 죽일 수 없다. 다리는 운동성을 상징하니, 이는 곧 동물적인 본능은 그 역동성을 없앨 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팔은 내뻗어서 무언가를 주고받을 때 사용한다. 즉, 팔은 영향력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동물적인 본성은 말끔히 없앨 수도 없고 역동적인 속성 역시 바꿀 수 없지만, 영향력은 통제할 수 있다. 그래서 베오울프는 그렌델의 팔을 뽑아 죽인다. 소년은 자라면서 내면의 동물적인 본성을 통제하는 법을 배운다. 이것이 소년이 남자로 성장하는 데에 거쳐야 하는 첫 단계이다.
두 번째 싸움 대상은 그렌델의 어미이다. 이 괴물은 더욱 강력하고 근원적이다. 그래서 이름도 없다.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원시적인 것은 실로 공포스럽다. 이름 없는 것에 대한 공포는 사실 뼛속까지 스미고도 남는데, 한술 더 떠서 이 괴물을 잡으려면 어두운 동굴로 내려가야 한다. 어두운 곳으로 내려가는 행위, 즉 지하세계로의 하강은 무의식 세계로의 하강을 의미한다. 어린 영혼은 내면의 가장 깊은 심연으로 내려가 이름이 없어서 강력한 존재와 싸워야 한다. 그 존재는 바로 원시 모성이다. 부풀려지고 미화된 모성 신화의 심연에서 아가리를 벌린 실체를 만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원시 모성으로는 인도 신화의 칼리 여신을 들 수 있다. 칼리는 어찌나 잔혹한지, 분노하면 사람을 산 채로 잡아 우득우득 씹어 먹으며 사람의 해골을 엮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두르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눈에 든 사람들은 어찌나 편애하는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속성도 있다.
사실 모성이라는 것은 자기 새끼만 챙기고 남의 자식들은 철저히 몰라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칼리의 편애는 그러한 모성의 속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모성에 대해 함부로 오해하고 숭배하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치 온 우주를 감싸고 품을 거대한 자궁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성을 대단한 것으로 올려다보면 안 된다. 이 모성에는 섬뜩한 진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히 남자들은 힘들고 지치면 어린아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다시 엄마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온전히 다 안겨 출렁이고 싶어한다. 그 편안함과 부드러움이 늘 그립다. 하지만 일단 한 번 어머니 배 밖으로 나오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자궁은, 아니 자궁과 가장 유사한 곳은 무덤뿐이다. 자궁이 영어로 ‘womb’이고 무덤이 ‘tomb’인 이유이다. 모성의 이러한 속성 때문에 사람은 성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모성을 끊어내야 한다. 자신 내면의 무의식 세계로 하강해서 어머니와 연결된 심리적인 탯줄을 끊어내야 한다. 그러면 비로소 소년은 그 심연에서 빛나고 아름답고 보다 큰 존재로 솟아오를 수 있다.
세 번째 싸움인 용과의 싸움은 더욱 복잡하다. 순수하고 강렬했던 젊은 시절의 대의와 꿈은 50년의 세월이 지나면 다 사그라진다. 서구의 용은 어마어마한 보물을 그 소굴에 축적해두고도 끊임없이 보물을 탐내며 그 보물들을 한 점이라도 빼앗길세라 깔고 앉아 불을 뿜는 존재로 그려진다. 즉, 끝도 없는 ‘탐욕’의 상징이다. 남자가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싸워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용이다. 이 싸움이 복잡한 이유는 이 용이 권력에 물들어 본질과 순수가 퇴색한 영웅 자신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싸움에는 다른 이는 아무도 함께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심한 부상을 입어야 자신에게 들러붙은 권력욕과 탐욕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베오울프를 도우러 홀로 온 젊은이, 위그라프는 ‘남은 용기’라는 뜻이다. 베오울프 안에 가냘프게 남아 있었던 순수하고 젊은 정신을 되찾을 때, 비로소 베오울프는 찌들었던 권력욕과 탐욕을 척살할 수 있다. 그리고 젊은 정신만을 유산으로 남기고, 늙은 베오울프는 그렇게 죽는다.
용을 죽이고 남은 거대한 보물을 사람들이 나누어 갖지 못하고 베오울프의 무덤에 함께 묻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사람은 자신의 탐욕, 자신의 권력욕과 함께 죽어 묻힌다. 나이가 들면 성욕도 식욕도 줄지만, 마지막까지 외려 놓지 못하는 것이 권력욕이라고 한다. 그렇게 떨치기 힘들고 극복하기 힘든 대상이 바로 보물을 깔고 앉아 불을 뿜는 이 용이다.
‘젊고 순수한 정신을 남기고 다른 것들을 놓아버릴 수 있는가.’ 이게 노년의 남자가 마주하는 마지막 시험이다.
베오울프는 남성의 일생에 대한 개괄이라 할 수 있다. 소년이 본성과 싸우고 원시 모성과의 탯줄을 끊어내 비로소 남자가 되어 영웅이 되었다가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와 싸워야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인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엿한 성인이 되어 사회의 권력과 기득권을 가지게 되었을 때 싸울 대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질문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본성의 팔을 뽑을 수 있는가, 나는 내면에서 어머니와의 심리적 탯줄을 끊어낼 수 있는가, 그렇게 진짜로 성인 남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사회의 기득권자와 권력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 움켜쥔 것들을 내려놓고 젊고 순수한 정신을 남긴 채 다음 세대를 위해 물러날 수 있는가.
이야기들은 늘 되돌아온다. 인생에서 주요 위기를 맞을 때마다 과거에 읽었던 이야기는 되돌아와서 위와 같은 질문들을 던질 것이다. 남자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구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담금질하고 궁구해가며 한 사람으로 완성된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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