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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은 고구려 침공 전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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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부드러운 관계

당태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요동 지역의 고구려를 강력한 라이벌로 인식했습니다. 수나라 때와 차이가 있다면, 수양제가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이었던 반면, 당태종은 가장 사랑받는 명군이었단 점입니다.
처음에 당태종은 미소정책을 썼습니다. 유학생을 교류시키며 적극적으로 화친정책을 편 것이죠. 때마침 고구려도 유래 없는 유화적인 자세로 일관했습니다.
먼저 고구려는 고구려-수나라 전쟁의 포로들을 풀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국적인 종교였던 도교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고구려 지도까지 보내는 파격적인 외교 행보를 보였습니다. 지도의 정확성과는 별개로, 자국의 지도를 보낸다는 것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도 비록 이기기는 했지만 수나라의 침공 같은 대규모 전쟁은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을 테죠.

고구려의 오판

언제 상황이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도 나름 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북쪽 부여성에서부터 남쪽 비사성까지 이른바 천리장성이라는 방벽을 쌓았습니다. 또한 주민들을 이곳으로 이동시켜 전략촌을 건설해 방비를 더욱 튼튼히 했죠. 아울러 당나라의 대내외정책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정보 인력을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당나라는 신생국이었고 돌궐, 토번 등과 빈번한 마찰을 빚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당분간 당나라의 침공은 없을 것이라 판단했죠.

당나라의 꿍꿍이

당나라는 고구려에 진재덕이라는 사신을 파견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평화의 사절이라고 홍보했지만 꿍꿍이가 있었습니다. 진재덕은 홍보를 빌미로 고구려 구석구석을 다니며 도로망이나 마을의 규모 등을 샅샅이 정탐했습니다. 수나라 출신 포로들을 통해서는 고구려군의 전략과 전투력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또한 당나라는 고구려 주변의 거란이나 말갈족을 부추겨 여러 차례 고구려에 대한 위력정찰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군의 방어 시스템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죠.
당나라는 소규모 첩보 조직을 지속적으로 고구려에 투입시켜 고구려의 지형지물과 군세는 물론, 심지어 강가의 수초 길이까지 면밀히 파악했습니다. 도강 시에 길게 자란 수초는 방해물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이렇듯 당나라는 고구려 침공을 위해서 주도면밀한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침공의 명분을 쌓다

연개소문 (상상화)

그사이 고구려는 내분에 휩싸였습니다.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나라 화친파인 영류왕을 살해한 것이죠. 이 과정에서 고구려 핵심 귀족층 18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와 함께 반대파 숙청까지 한꺼번에 해치웠죠. 화친파인 왕이 쿠데타로 제거된 것이어서 당나라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일이 연속해서 터집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를 자기 관할 하에 두는 제후국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백제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라는 당나라로 사신을 파견해 도움을 요청했죠. 당나라는 즉시 사신들을 고구려와 백제에 보내 싸움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싸움을 중단시키기 위해 당나라가 사신을 파견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당나라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당나라는 천자의 나라로서 제후국의 분쟁에 개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요구를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아마도 당나라는 이런 고구려를 기다렸는지도 모릅니다. 이 일로 고구려를 칠 명분이 계속 쌓여갔기 때문이죠.

수양제와 당태종의 결정적 차이

당태종

대책 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던 수양제와는 달리, 당태종은 전쟁 준비와 함께 명분도 만드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또한 그는 고구려의 내부 사정도 정확히 간파했죠. 고구려는 북방 지역의 거점을 국내성으로, 한반도 지역의 거점을 평양성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지역은 환경 차이가 커서 갈등의 요인이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당나라의 화친정책으로 대외적인 위협이 사라지니 고구려는 내분으로 복잡해졌습니다. 당태종은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 이후 단결되지 못했음을 예측하고 시기를 노린 것이죠.
당태종은 대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내부적인 민심 수습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사실 수나라가 망한 이유는 무리한 고구려 원정 때문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수백만 수나라 백성들이 엄청난 고통을 받았죠. 그러므로 이제는 당나라 백성이 된 당시 중국인들은 고구려 원정이라는 말만 들어도 치를 떨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필연적으로 또다시 고구려 원정을 해야만 했죠. 당태종에게는 아마 백성들을 설득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난제였을 것입니다. 그는 수도 장안에 노인들을 모셔놓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고구려 원정의 당위성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외교와 내치를 착실하게 병행하며 고구려 침공을 준비한 것입니다.

이 포스트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리터리 세계사 1. 고대편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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