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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은 정말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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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성, 전략적 요충지

당나라의 침공을 받은 고구려, 요동성과 백암성이 당나라군의 손아귀에 떨어지자 위기에 몰렸습니다. 요동 지역에서 남은 성은 안시성뿐이었죠. 만약 고구려군이 안시성을 잃는다면 요동 전체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안시성은 당나라군에게도 최고의 전략 목표였고, 고구려 입장에서도 사활을 걸고 지켜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고구려 장군 고연수가 15만이 넘는 대부대를 이끌고 안시성으로 향했습니다. 이제 당나라 군대와 고구려의 대규모 정예 부대가 피할 수 없는 처절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당연히 안시성 전투는 고구려-당나라 전쟁에서 최대의 클라이맥스가 됩니다.

고구려 내분을 간파한 당태종

당태종은 안시성 공략 전, 부하들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구려의 장군 고연수에게 방책이 있다면 세 가지다. 군사를 이끌고 바로 전진하여 안시성과 연결하여 진지를 구축하고, 고산의 험한 곳에 의지하여 성 안의 양식을 먹고, 말갈병을 놓아 우리의 우마를 노략하면 이를 쳐도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고, 돌아가려면 요하의 진창이 장애가 되어 앉아서 우리를 괴롭힐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병사를 빼어 함께 도망함은 중책이다. 지능을 헤아리지 않고 와서 우리와 싸움은 하책이다. 경들은 보라! 적들은 반드시 하책으로 나올 테니 포로가 됨은 내 눈 안에 있다.”

당 태종

당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할 때부터 고구려의 내분을 간파했습니다. 북쪽의 안시성이 공격을 받을 때 평양성에서 원군이 오겠지만, 과연 파벌이 다른 원군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강한 의구심을 가졌죠. 사실 안시성은 파벌이 다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안시성 성주는 연개소문의 쿠데타를 격렬히 반대했었고 쿠데타에 성공하여 권력을 잡은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으로 달려와 성을 함락시키려 했을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보면 ‘내부의 적’인 셈이었죠.

안시성도 고민에 빠집니다. 만약 원군을 성 안으로 덜컥 받아주었더니 성주부터 갈아치우지 말란 법도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당태종은 상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반대파이니 당연히 중책도 불가. 남은 것은 하책뿐이었죠.

당태종이 이렇게 고구려의 내분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은 그만큼 당나라의 첩보망이 잘 굴러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구려, 주필산 전투에서 패하다

고구려에서 급파한 고연수의 15만 대군과 당태종의 본대가 드디어 맞짱을 뜨게 됩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당나라군과 고구려군이 대치했는데 이곳이 주필산입니다. 여기서 또 고구려군의 의견이 갈라져 공격하자는 쪽과 방어를 굳히자는 쪽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이때 당나라는 기병 1,000을 보내 소규모 전투를 시도해 일부러 패하고 물러납니다. 사기가 오른 고구려군은 절반이 내쳐나가 강을 건너 당나라군과 접전을 벌였죠.

당시 당나라군 사령관은 이세적으로, 역시 당태종이 몹시 아끼는 신하였습니다. 이세적은 이민족 출신의 장수 장손무기에게 기병을 주어 우회해서 고구려군의 후방 급습을 명했습니다. 쉽게 말해 이세적의 보병이 고구려군과 접전을 벌이면서 버티는 동안 장손무기의 기병이 고구려군의 배후를 기습해 샌드위치 작전으로 고구려군을 박살내는 전술이었죠. 이세적 보병의 손실이 컸지만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군은 대패했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당나라군의 경기병대에게 걸려 막심한 피해를 입고 맙니다. 결국 전투에 투입되었던 고구려군은 당나라군에게 항복했고, 강 건너에 아직 남아 있던 고구려군은 황급히 후퇴했습니다.

 

육화진법, 당나라 승리 비결

당시 당나라군은 육화진법六花陣法이란 독특한 방진법을 사용했습니다. 육화진이란 여섯 개의 꽃을 뜻하는데, 당나라의 개국공신 이정이 창안한 진법입니다. 육화진법의 단위부대를 행군이라 하는데, 이 행군의 규모는 약 2만 명 정도입니다. 여섯 개의 꽃은 노수, 궁수, 마군, 도탕병, 기병, 치중병을 말하는데, 이중 치중병은 보급부대로 2만 명 중에 약 6,000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노수[석궁]와 궁수 등 원거리 발사무기를 가진 자가 4,200, 마군과 도탕병, 기병 등은 말을 타는 부대였습니다.

균형 잡힌 육화진법의 목적은 아군의 장점을 살리고 적의 장점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 군대의 장점은 누가 뭐라 해도 병력의 수입니다. 그런데 수나라와 같이 병력의 수만 믿고 전쟁을 할 경우 전술이 부재되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따라서 당나라군은 군대의 조직화에 힘을 쏟습니다. 많은 병력이란 장점에 조직화가 더해지면 그 전투력은 두 배, 세 배가 되니까요. 이 조직화의 결과가 육화진법이었고, 이 조직화된 진법 덕분에 당나라군은 무너지지 않고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당태종은 안시성 전투에서 화살을 맞았을까?

당나라군이 주필산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아직 안시성은 고구려군의 수중에 있었습니다. 갈수록 당나라군의 보급 사정도 여의치 못했죠. 고구려군은 낮에는 성 안에서 얌전히 방비하다가, 밤이 되면 소규모 부대로 당나라군에게 히트앤드런 작전을 구사합니다. 잠을 못 잔 당나라군은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당태종은 군사의 사기를 위해 약탈을 허용했습니다. 빨리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도리가 없었죠. 이렇게 되니 성주인 양만춘 이하 안시성의 모든 병사들과 백성들은 일치단결하여 결사항전을 시작했습니다. 약탈은 곧 모두의 죽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당태종은 마지막 공성작전으로 토산을 쌓습니다. 쉽게 말해 성벽으로 오를 진입로를 쌓는 방법이죠. 안시성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토산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비가 내려 토산이 무너지면서 안시성 성벽 일부를 무너뜨립니다. 당나라군 입장에서는 두 번 다시 못 올 절호의 기회를 잡은 것이지만 현장에는 당나라군 지휘관이 없었습니다. 당나라군은 우물쭈물하는 사이 고구려군이 안시성에서 쏟아져 나왔습니다. 사흘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고구려군은 대승을 거두고 당나라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되돌아갔다는 말이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고 애꾸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고려의 문인 이색이 지은 시에 등장합니다만 학계에서는 신빙성 없는 이야기로 보고 있습니다. 당나라군은 고구려 침공을 포기하고 되돌아갑니다.

이 포스트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리터리 세계사 1. 고대편』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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