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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가 사랑한 두 장수, 위청과 곽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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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가 흉노정벌 결심한 까닭은?

한무제는 왕위에 오른 지 2년 뒤인 BC 139, 장건을 서역 월지국에 사신으로 파견했습니다. 이때 장건이 개척한 길이 그 유명한 비단길(실크로드)입니다. 당시 한나라의 주요 생산품은 비단이었는데 이 비단을 서역에 많이 팔아야 수익이 납니다. 그런데 서역으로 가는 도중에 흉노족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비단을 안정적으로 많이, 잘 팔기 위해서는 이들을 반드시 제거해야 했습니다.
마침내 한무제는 흉노 정벌을 결심합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60년 이상 지속된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로 결심한 것이죠. 당근을 버리고 채찍을 선택한 한무제의 용단 이후 약 220년에 걸쳐 한과 흉노는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의 최종 승자는 한나라였습니다.

1차 흉노 정벌의 영웅, 위청과 곽거병

한무제의 흉노 정벌은 여러 차례에 걸쳐 행해졌는데, 그중 흉노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전쟁은 네 차례 정도였습니다. 1차 정벌의 영웅은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입니다.
위청은 천한 양치기 출신이었는데 위청의 여동생 위자부가 한무제의 누나인 평양공주의 노비였습니다. 한무제는 위자부를 후궁으로 들였고, 황후이 애를 못 낳자 폐서인시키고 위자부를 황후로 봉했습니다. 한방에 인생역전에 성공한 황후 위자부는 자신의 오빠인 위청에게 기회를 주라 청했고, 한무제는 흉노 정벌 장군의 한 사람으로 위청을 임명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명백한 낙하산 인사지만 당시에는 신분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던 시절이었기에 딱히 황제가 여자 때문에 권력을 남용한 것으로 볼 만한 사건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다행히도 위청은 자리에 걸맞은 실력을 갖춘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북송 때 사마광이 쓴 <자치통감>에서는 위청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위청은 비천한 노비 출신이었지만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능력이 일반 사람들보다 월등하고 사대부를 만나면 예의를 갖추고 사병들에게 관대했다. 모두 그의 지휘를 받기 원했고 장군의 자질이 있어서 매번 출병하면 공을 세웠다.

위청은 총 일곱 번 원정을 갔는데, 그의 조카 곽거병은 5차 원정 때 18세의 나이로 처음 전투에 참가했습니다. 천부적인 전투 능력을 발휘한 곽거병은 특히 기병을 이끌고 적진을 휩쓸었는데 이 모습에 한무제가 감탄했다고 합니다. 곽거병의 능력을 높이 산 한무제는 정예 병력을 곽거병에게 몰아주었습니다. 하필 그때가 위청이 흉노에게 크게 패배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곽거병의 부대만 홀로 승승장구했고, 이에 한무제는 20세의 곽거병을 일약 장군으로 임명합니다. 글자 그대로 파격적인 승진이었습니다.
곽거병은 숙부인 위청과는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정반대였다고 하는데, 전형적인 형님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던 곽거병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병사들을 휘어잡는 기술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두 장수의 상반된 됨됨이

한나라 장수 이광은 위청 못지않게 평생을 흉노와 싸웠지만 번번이 전공을 인정받지 못했던 비운의 장수입니다. 특히 BC 119, 대대적으로 흉노 정벌을 할 때, 위청의 지시로 후방을 맡은 이광은 초행길로 진군하다 길을 잃어 제때 전투 현장에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는 위청의 실수였습니다. 아무튼 조정에서는 조사관을 파견했는데, 수모를 견디지 못한 이광은 자살해버렸습니다. 여기서부터 일이 커졌습니다. 이광의 큰아들이 위청을 원망하고, 급기야 위청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위청은 묵묵히 맞고만 있었습니다. 또 이 사실을 위청은 불문에 붙였으나 곽거병은 대노하여 이광의 큰아들을 죽여버립니다. 두 인물의 극과 극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위청에 대해 사람됨이 인자하고 선량하며 겸허했고 온화한 성품으로 황제의 환심을 샀다.”고 높이 평가한 반면, 곽거병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젊어서 이미 높은 벼슬을 지냈고 짧은 시간에 고귀한 신분이 됐기에 사병을 돌볼 줄 몰랐다.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면 황제가 그를 위해 수십 대 수레분의 음식을 보내주었는데 돌아올 때는 양식 실은 수레를 버렸고, 남은 양식과 고기가 있었음에도 병사들 중에는 굶주린 자가 있었다. 병사들은 배고픔을 참고 견디고 있었지만 표기장군은 구역을 표시해 놓고 공차기를 즐겼다. 그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많았다.

이 포스트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리터리 세계사. 고대편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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