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셀트리온은 선구적인 기술이 없었습니다. 셀트리온 창업자 서정진 회장(이하 서정진)은 셀트리온이 처음부터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생명공학 전공자가 아니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회사들이 최소 수십 년에서 수백 년에 걸쳐 쌓은 연구개발 노하우를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자만이죠. 셀트리온은 기술을 가진 회사에 낮은 자세로 도움을 요청했고 역시 겸손한 태도로 감히 신약을 넘보지 않고 첫 개발 제품으로 바이오시밀러를 택했습니다.
“맨몸으로 신약에 도전하는 회사들을 보면 정말이지 당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자신이 없어서 뛰어들지 못했거든요. 대기업이 아닌 한 한국에서 바이오 기업이 스스로의 힘으로 글로벌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건 무모한 짓이에요.”
국내 바이오 회사들이 줄줄이 임상에 실패하는 걸 보면서 서정진 회장이 한 말입니다.
현실 자각 능력이 뛰어났던 그는 ‘혁신 기술의 부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그것은 ‘스피드’를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삼성도 처음에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을 빠르게 쫓아가는 전략 또는 그 기업)로 승부했죠. 한국이 반도체 시장도 제패했는데 제약 시장도 제패 못 할 이유가 없다고 서정진은 생각했습니다. 경쟁자와 차별화되는 특별한 강점에 집착하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이야말로 간과하기 쉬운 요소입니다.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는 저서 『성공의 공식 포뮬러』에서 “시간은 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가지기 어려운 사치품”이라고 정의합니다.
이 말은 환자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제약업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시간을 버는 자가 돈을 번다.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을 시간을 벌어주는 의약품을 경쟁사보다 빨리 내놓아야 합니다. 앞서 나간 제약사는 그만큼 시장 선점 효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셀트리온은 아시아 최초이자 최대의 동물세포 배양 공장을 가진 덕분에 제품의 개발부터 생산까지 걸리는 시간을 대폭 단축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바이오시밀러를 개발하지 않을 때인 2006년부터 연구개발에 돌입했고, 오리지널 바이오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자마자 일등으로 시장을 파고들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에도 등재된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으로 채찍질하며 달려온 결과입니다. 셀트리온은 시장에서 가장 먼저 출시한 바이오시밀러를 뜻하는 ‘퍼스트 무버’(시장 개척자) 제품을 잇달아 선보였습니다. 덕분에 셀트리온은 후발 주자와 격차를 크게 벌릴 수 있었습니다.
서정진은 혁신에 맞설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속도라는 걸 항상 명심했습니다. 셀트리온은 연구개발뿐만 아니라 구매, 영업, 판매 및 마케팅 등 모든 분야에서 의사결정 과정이 단순하고 빠릅니다. 중요한 사안은 보고서를 올리고 회의를 소집할 필요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정합니다.
매사에 신속하게 대응하겠다는 의지는 조직 구성에서도 드러납니다.
셀트리온헬스케어는 해외직접판매체제를 갖추기 전인 2018년까지 유럽의 14개 법인 중 네덜란드 법인에만 사무실을 뒀습니다.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해외영업팀 직원들은 유럽 전역의 호텔을 다니며 생활했습니다. 셀트리온은 평균 연령 31.8세의 젊은 기업답게 입사 10년 차도 안 된 30대 과장이 법인장 역할을 맡기도 합니다. 국내 주요 기업들의 해외 법인장들이 50대인 것과 비교하면 그 격차는 더욱 크게 느껴지죠. 젊은 직원들이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듯 전 세계를 다니면서 유통망을 구축했습니다. 셀트리온 직원들은 캐리어 하나 달랑 끌고 유럽, 미국, 동남아 전역을 지방 출장 가듯 돌아다닙니다. 해외 의료진과 파트너사들은 셀트리온 직원들의 일 처리 속도에 혀를 내두릅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도세 데옥투브레 대학병원의 카를로스 그랑데 혈액암 전문의는 “글로벌 제약사 직원들을 많이 만나봤지만 셀트리온처럼 피드백이 빠른 회사는 없었다”고 했습니다.
서정진은 셀트리온의 빠른 의사결정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그럴 때마다 자랑스레 언급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한일 관계가 악화일로로 치닫던 2019년 8월 2일 일본이 수출 우대국 명단인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제외했을 때, 그 조치로 수입 차질이 예상되는 일본산 원부자재만 1100여 개에 달했습니다. 생산에 필수적인 부품이나 소재의 공급이 끊기면 공장 가동을 중단해야 할 수도 있었죠.
서정진은 화이트리스트 문제가 불거졌던 7월 말 긴급 대책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셀트리온은 약 20종을 일본에서 수입했는데 바이러스 필터를 제외한 부분의 다행히도 소모품들은 미국, 독일제로 대체가 가능했습니다. 서정진은 구매 담당자에게 바이러스 필터를 만드는 일본 아사히카세이 공장으로 날아가 재고 물량을 최대한 확보하라고 지시했습니다. 담당자는 가져올 수 있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고 서정진에게 전화했고, 그 자리에서 구매 대금 승인이 났습니다. 셀트리온은 공장에 쌓여 있던 바이러스 필터를 전부 ‘싹쓸이’해왔습니다. 1년 이상 쓸 분량이었죠. 불과 하루 만에 이뤄진 일입니다.
“문제가 터지면 그날 바로 해결합니다. 회장인 제가 나서서 바로 결정을 해주니 빠를 수밖에 없죠. 결재 라인에 따라 절차가 있는 대기업은 상상도 못 할 겁니다.”
“우리 회사는 회장, 부회장, 본부장까지 의사결정 속도가 엄청나게 빠릅니다. 문제가 터지면 관련 부서에서 힘을 모아 헤쳐 나가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어요. 제가 처음 부회장님에게 보고할 때 2020년 12월 5일 승인이 목표라고 하면 그 타임라인은 절대 안 바뀝니다. 은근슬쩍 2021년 1월로 미룰 수가 없어요. 버전1로 못 박으면 그걸 맞추기 위해 다른 업무를 조정해서 해결합니다. 정 안 될 때는 경영진 앞에서 타당성에 대해 논의를 한 다음에 허락을 받아야 돼요. 그게 무서운 점이죠.”
권기성 셀트리온 연구개발 본부장의 말입니다.
공격적인 데드라인을 세운 도전 과제에 성취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이직해 셀트리온으로 왔고 끝까지 남은 셈입니다.
서정진은 이런 직원들과 일하면서도 ‘빨리빨리’를 외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면 임원뿐만 아니라 실무자에게도 전화해서 세세한 부분까지 물어봅니다. 서정진은 업무 속도를 올리려면 상황을 빨리 파악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셀트리온의 계열사 사장들은 오전과 오후, 하루에 두 번씩 서정진의 전화를 받습니다. 서정진이 출장 중이거나 바쁠 때면 비서실에서 대신 전화를 합니다. 내용은 간단합니다. 아침 회의 이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했는지 확인하는 것이죠. 수시로 상황을 점검하고 대처하는 게 셀트리온의 습관이자 경쟁력입니다.
이 포스트는 『셀트리오니즘 : 셀트리온은 어떻게 일하는가』를 바탕으로 발췌, 재구성 정리한 것입니다.
회장님은 오늘도 이 곳을 훔쳐본다? (0) | 2020.12.17 |
---|---|
대한민국 주식부호 1위의 상처주지 않는 거절법 (0) | 2020.12.14 |
"내 인생 남에게 묻지 마세요" 셀트리온 서정진 회장의 당부 (0) | 2020.12.10 |
회장 사장보다 돈 더 받는 썰 푼다 (0) | 2020.12.08 |
『셀트리오니즘』 (0) | 2020.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