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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욕망은 과연 나의 것일까?

인문 교양 읽기/5분 뚝딱 철학 : 생각의 역사

by 스마트북스 2021. 1. 21.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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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만족을 모를까?

어떤 사람은 미친 듯이 자동차를 사들이고, 어떤 사람은 미친 듯이 구두를 쇼핑합니다.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연애상대를 찾아 만나고, 어떤 사람은 미친 듯이 독서를 하죠. 왜 어떤 사람들은 한 대의 차, 한 켤레의 구두, 한 명의 상대, 한 권의 책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찾아 계속 방황할까요? 이에 대한 라캉의 설명을 들어보겠습니다.

욕구, 요구, 욕망

라캉은 인간이 가지는 욕구와 요구, 그리고 욕망을 구분합니다.
욕구란 식욕, 수면욕, 배설욕과 같은 생물학적으로 필요한 것을 채웠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엄마에게 젖을 달라고 울고 잠이 오면 재워달라고 울어요. 이것이 요구입니다. 엄마가 아기에게 젖을 주거나 토닥토닥 재워주면 아기의 욕구는 금세 충족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아기는 배가 고픈 것도 아니고 졸린 것도 아닌데 그냥 짜증을 내고 생떼를 부립니다. 구체적인 욕구가 생긴 것이 아닌데 무언가를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엄마에게 옆에 24시간 붙어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때그때 채워달라고 합니다. 이때 아기가 요구하는 것은 엄마의 무제약적인 사랑이에요. 그런데 식욕이나 수면욕은 엄마가 그때그때 채워줄 수 있지만, 이런 무제약적인 사랑은 어느 누구도 채워줄 수 없죠. 이처럼 절대로 충족되지 않는 요구가 바로 욕망입니다. 말하자면 요구에서 욕구를 뺀 것이 바로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절대로 채워질 수 없지만, 사람들은 저 차만 타면, 저 신발만 신으면, 저 사람과 관계만 맺으면, 저 책만 이해하면 자신의 욕망이 채워질 거라고 착각합니다. 이러한 결핍은 결코 해소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차를 사고, 또 다른 신발을 사고, 또 다른 상대를 찾고, 또 다른 책을 읽지만 곧 그것이 헛수고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질문】 우리의 욕망은 왜 채워지지 않을까요?
나의 욕망이 내 욕망이 아니라 사실은 타자, 즉 다른 사람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걸까요?
라캉은 그 이유를 아기와 엄마와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상상계 속에는 아기와 엄마의 2자 관계만이 있는데, 이때 아기에게는 엄마가 전부입니다. 아기는 엄마가 무언가를 결핍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기는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엄마 말을 잘 듣고, 엄마 말대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의사가 되는 것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에 의해서 주입된 욕망입니다.
현대 소비사회는 인간의 이러한 욕망을 계속해서 부추깁니다. 광고는 저 가방이 내 욕망이야라는 착각을 심어주고, 학벌주의는 저 대학이 내 욕망이야”, 미인선발대회는 저 여자가 내 욕망이야”, 5분 뚝딱 철학과 같은 책은 저 철학이 내 욕망이야라는 착각을 계속 심어줍니다.
심지어 이런 것들은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일 뿐이야라고 하면서 모든 욕망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행위도,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삶도, 이타적인 삶을 살겠다는 결정도, 수도자의 삶을 살겠다는 선택도, 사실은 또 다른 타자의 욕망일 뿐입니다. 헛된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려 하는 행위 또한 또 다른 헛된 욕망일 뿐이라는 말입니다. 결국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은 실패합니다.

욕망은 본질적으로 결핍

질문인간은 왜 욕망을 피할 수 없을까요?
욕망은 아이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될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남자아이가 4세가 되면 어머니에 대한 성적 욕망을 갖게 되고, 엄마를 차지하고 있는 아빠에 대해서는 적대감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아빠와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엄마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데, 이 욕망은 무의식 속에 억압됩니다. 이제 아빠는 물리쳐야 할 대상이 아닌 본받아야 할 대상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엄마와 아빠에게 가졌던 양가적인 감정이 해소됩니다.
이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라캉의 설명을 들어보죠. 상상계 속에는 아기와 엄마의 2자 관계만이 있고, 이때 아기는 자신이 엄마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엄마가 원하는 것이 뭘까요? 그것은 남근, 즉 팔루스입니다. 그래서 아기는 자신이 엄마의 팔루스라고 생각하는데 아버지가 나타납니다(I am your father). 아버지는 금지의 상징이죠. 이제 아기는 자신이 엄마의 팔루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을 바로 상징적 거세라고 합니다. 이때 아기는 언어라는 상징적 질서로 들어가게 되고, 비로소 주체가 형성됩니다.
라캉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엄마에 대한 욕망의 자리에 상징계의 질서가 채워지면서 주체가 형성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에 대한 욕망이 있었던 빈자리가 채워지는 것은 아니고 영원히 결핍된 상태로 남습니다. 다시 말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결핍을 발생시킵니다. 그래서 욕망은 본질적으로 결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포스트는 5분 뚝딱 철학 : 생각의 역사(김필영)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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