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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하우스에서 SNS까지 : 글쓰기의 어제와 오늘

좋은 부모/장선화의 교실밖 글쓰기

by 스마트북스 2017. 4. 17.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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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하우스에서 SNS까지 : 글쓰기의 어제와 오늘

서양사에서 17~18세기는 계몽의 시대, 이성의 시대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비로소 인간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라는 것을 세상에 천명했습니다. 또 유럽에서 불기 시작한 사회 변화의 흐름은 농업혁명, 과학혁명, 상업혁명으로 이어져 18세기에 이르러 영국을 중심으로 산업혁명의 시대가 열립니다. 정치적으로는 시민혁명을 완수하고 근대국가를 수립합니다.

지식혁명의 둥지, 커피하우스

17세기 영국의 커피하우스 전경(브리티시박물관 소장)

커피하우스는 17~18세기에 자유로운 토론과 혁신의 정신을 키워낸 둥지입니다. 1640년대에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시작으로 1650년대에는 영국에서 그리고 1660년대에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문을 열었지요. 시인과 작가 같은 문단의 인사는 물론 증권거래소 금융인과 기업인 그리고 법조인, 과학자, 신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인들이 커피하우스를 찾았습니다. 출신 배경과 상관없이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이 편안하게 대화하거나 토론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 있었지요.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1687)가 탄생한 것도 커피하우스에서 벌인 논쟁 덕분이었습니다.중력의 역제곱 법칙에서 타원형 궤도가 생기는가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뉴턴은 로버트 훅, 크리스토퍼 렌, 로버트 보일 등 옥스퍼드대학교 학자들로부터 질문을 받았고, 이 문제를 파고들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몇 년후 나무에서 떨어지는 사과에 착안해 만유인력의 원리를 발견해 이 책에 그 내용을 실었지요.
커피하우스에는 돈 버는 정보도 넘쳐났습니다. 선장, 선주, 상인이 모여서 최신 항해 소식을 공유하고 선박과 화물 경매에 참가했습니다. 또 여기서 나온 정보를 수집하고 요약해서 정기적으로 뉴스레터를 발행했습니다. 고전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 역시 커피하우스에서 탄생했습니다. 애덤 스미스는 주로 런던의 브리티시 커피하우스란 곳에서 글을 썼다고 합니다.
커피하우스에서 벌어진 토론 내용을 학회에서 수집해 뉴스레터 형식의 인쇄 책자로 발간한 후 학자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진 대표적인 학술지가 런던 왕립학회 철학회보입니다. 영국 왕립학회 서기였던 헨리 올덴부르크가 창간했지요.

전신의 발명과 신문의 대중화

산업혁명, 과학혁명, 시민혁명 등 눈부신 혁신은 19세기에도 계속됩니다. 1844년 새뮤얼 모스가 미국 볼티모어에서 열린 휘그당 전당대회 결과를 전신으로 워싱턴 DC에 타전하는 데 성공하면서, 통신의 역사를 새롭게 썼습니다. 지금껏 어떤 소식을 먼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 전할 때면 말이나 기차 혹은 배를 이용했는데,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진 겁니다. 1846년에는 뉴욕과 필라델피아를 잇는 첫 전신 선로가 개통되었고, 그로부터 50년 뒤에는 이탈리아의 공학자 굴리엘모 마르코니가 무선 전신을 발명하면서, 바다 건너 나라에도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송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인쇄술이 발전하고 증기 인쇄기가 등장하면서, 신문이나 책을 제작하는 시간 역시 놀라울 정도로 짧아졌습니다. 이전까지는 노련한 인쇄공이 한 시간에 250~300장 정도를 찍어 냈는데, 증기 인쇄기가 등장한 후 기계 한 대가 한 시간에 1500부를 찍어 냈습니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기 시작한 건 비단 요즘의 일이 아니라, 일찍부터 그 조짐이 있었던 겁니다.

1830년대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미국 뉴욕에서는 아이들이 거리에서 신문을 팔았다.

신문이 매일 나오자, 신문은 소식통이자 광고판 역할을 했습니다. 19세기 초에는 전문 직업인으로서 기자가 등장합니다. 오늘날은 신문기사를 기자가 쓰는 게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참신한 아이디어였어요. 그전까지는 인쇄업자가 기자이자 편집자였거든요.
신문을 보는 사람들이 늘면서, 신문을 다른 지역으로 더 빨리 보내기 위해 조랑말 속달우편을 이용하고 다른 나라의 신문을 빨리 받아 보기 위해 쾌속선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신문 가격이 미국 기준으로 1센트까지 낮아지면서 신문사 간 경쟁도 치열해졌습니다. 오늘날의 신문, 방송 뉴스, 인터넷 매체의 속보 경쟁도 어쩌면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어요. 1848년에는 뉴욕의 신문사 몇 곳이 정보를 공유하고 전신사와의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연합을 결성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AP통신(Associate Press)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19세기는 방송과 영상 시대의 개막을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전화와 브라운관, 사진과 영화 기술이 다 이때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상업적인 라디오 방송국(미국의 KDKA)과 텔레비전 방송국(미국의 W3XK)이 최초로 세워지지요.

1920년 11월 2일 피츠버그에서 개국한 미국의 첫 상업 라디오 방송국 KDKA(왼쪽).

 

컴퓨터와 인터넷 기술의 만남

20세기에 들어 현대 과학기술은 정말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르고 화려하게 발전했으며,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명으로 그야말로 신세계를 열었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문자와 책의 역사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생활과 학교, 일터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러면 그 역사를 간단히 한번 살펴볼까요.
 
컴퓨터
컴퓨터는 1940년대에 계산기 기능을 하며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만남은 1960년대 미국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인 ARPA(Advanced Research Project Agency)의 연구원들이 전화선으로 컴퓨터 여러 대를 연결해 데이터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전 세계 사람들이 사이버공간에 모이기까지는 약 3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1980년에 들어서야 네트워크 회선으로 컴퓨터끼리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데이터 전송 표준(TCP/IP), 사용자@호스트(예를 들면 happy@korea.com) 표준이나왔으니까요.
 
월드와이드웹
1991년에는 사이버 세상을 더욱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 세계 최초의 브라우저인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개발되었습니다.
월드와이드웹의 등장으로 우리는 전세계 10억 인구가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정보를 올리고 공유하는, 그야말로 글로벌한 시대를 맞게 되지요. 1994년에 최초의 상용화 웹브라우저인 넷스케이프가 등장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이후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와 애플의 사파리, 구글의 크롬 등이 개발되면서 웹브라우저가 진화, 발전했습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2000년대에 미국을 시작으로 닷컴 열풍이 불면서 포털사이트가 등장했습니다. 미국의 야후와 구글, 한국의 다음과 네이버 등이 잇따라 서비스를 시작했지요. ‘관문이라는 뜻의 포털(portal)은 현재 개인종합정보서비스센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메일을 확인하고, 신문을 읽고, 블로그를 작성하고, 검색을 하고, 사전을 찾는 등 한 자리에 앉아서 웬만한 정보는 거의 다 얻을 수 있게 되었지요.
 
블로그, 카페, SNS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 사이버공간에 다양한 동호회가 만들어지고 블로그와 카페가 등장했습니다.
누구나 PC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상에 글을 올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스토리 같은 SNS의 일상화로, 타인과 의사소통하거나 정보를 공유할 때 글의 분량은 적어지고 사진과 동영상을 많이 활용하는 것 또한 눈여겨볼 만한 변화입니다.    
                         
                    

이 포스트는 장선화의 교실밖 글쓰기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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