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연의>는 소설일 뿐
소설 <삼국지>는 동양에서는 영원한 베스트셀러입니다. 정확히 말해 소설 <삼국지>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인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피를 끓게 하는 뭔가가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은 소설일 뿐, 위・촉・오의 진짜 역사는 위나라 다음 왕조인 사마씨의 진나라 시절, 역사가 진수가 쓴 <삼국지>에서 봐야 합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는 엄청난 각색이 들어가 정사와는 상당한 차이를 보입니다.
나관중은 천 년도 더 지난 후대인 명나라 초기의 소설가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장편백화소설 <삼국지연의>를 저술했습니다. 송나라 때부터 <삼국지>는 연극이나 만담의 단골소재였죠. 전문 이야기꾼들의 이야기 대본을 ‘화본畫本’이라 하는데, 이 화본들을 모아 연극의 대본으로 많이 쓰였고, 가장 인기 있는 연극은 단연 초나라 항우와 우미인의 이별을 그린 <패왕별희>와 전국시대의 영웅담 <삼국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화본을 바탕으로 원나라 때 간행된 <전상삼국지평화全相三國志平話>란 책도 이미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었죠. 나관중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주석들에 수록된 야사와 잡기를 근거로 삼고, <전상삼국지평화>의 줄거리를 뼈대로 <삼국지연의>를 멋들어지게 써내려갔습니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후에도 <삼국지>는 여러 작가들에 의해 계속 다듬어지고 각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가짜뉴스 '도원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무렵 유비가 관우, 장비를 만나 복숭아밭에서 도원결의를 맺는 것으로 나오지만, 도원결의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수많은 중국 사가들이 그 복숭아밭을 찾아내기 위해 수백 년을 뒤졌지만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이었기에 찾는 데 실패했습니다. 지금은 유비의 고향 탁현에 복숭아밭을 만들어서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을 뿐입니다.
파격적인 역사서, 진수의 <삼국지>
진수의 이른바 ‘정사正史’ <삼국지>는 후한 말기부터 사마씨의 진나라 초까지 다룬 총 65권의 역사서로 중국에서 정사로 인정받는 25종의 역사서 가운데 하나입니다. 대부분의 중국 역사서는 유가적 사관으로 쓰여 있어서 도덕적인 면을 중요시한 반면 진수의 <삼국지>는 인물의 능력 위주로, 사건의 과정과 결과를 감상적이지 않고 간결하게 정리한 것이 특징입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역사서인 것이죠.
진수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인물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적당한 성공에 만족하는 관망파와 정점에 도전하는 대권파가 그것입니다. 그는 관망파의 대표적 인물로 유주의 공손찬과 형주의 유표를 꼽는데, 둘 모두 한자리씩 차지하자 성을 쌓고 대세를 관망하는 그저 그런 캐릭터로 규정합니다. 반면 천하를 품는 야심을 가진 인물들은 당연히 유비, 조조, 손권으로, 이들은 대권파로 분류됩니다. 진수는 이 세 명의 대권파를 당시 가장 중요한 인물들로 간주했기 때문에 역사서의 이름을 <삼국지>라 지었습니다.
소설과 정사, 삼국지 인물 차이
<삼국지연의>에서 묘사한 유비, 조조, 손권의 모습은 정사와는 많이 다릅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습니다. 소설 <삼국지>는 셋을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묘사하는데, 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예견한 신흥세력이란 점입니다. 예를 들어 유비를 이야기해보면 유비 하면 덕德으로 상징되기 때문에 소싯적부터 공부를 열심히 한 착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정사에서 유비는 옷과 음악, 그리고 여자를 꽤나 좋아했던 사람입니다. 또한 소설에서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가난한 돗자리 짜는 청년으로 나오는데, 실상 유비네 집안은 지방 토호 수준은 되는, 지금으로 치면 나름 중산층이었습니다. 손권도 소설에서는 다소 우유부단하고 수성에만 신경 쓰는 인물로 나오지만, 정사에서는 모략과 술수의 천재로 묘사됩니다.
원소군 70만, 조조군 7만도 완벽한 허구
화북의 양대세력이던 조조와 원소가 맞붙은 관도대전을 살펴볼까요. 관도대전은 조조가 다른 유력한 세력을 제압하고 권력을 잡을 수 있었던 결정적 전투로 평가됩니다. 당시 원소는 동탁이 새롭게 옹립한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죠. 반면 조조는 황제를 손안에 넣고 정통성을 주장하며 원소와 대립했습니다. 중국 북부화북 세력의 두 영웅이었던 조조와 원소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소설에서는 원소군 70만 대 조조군 7만이라 했는데 이는 완벽한 허구입니다. 한나라 말기에 중국 인구를 아무리 여유 있게 추산한다 하더라도 5천만 명이 넘지 않습니다. 특히 삼국시대 때는 인구가 급감해 역사가들은 삼국시대 당시의 인구를 약 3천만 명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70만의 병력을 동원한다? 이것은 소설의 뻥튀기라고 보면 됩니다. 쉽게 말해 소설에 나오는 병력에서 0 하나씩 빼면 얼추 현실적인 병력 수가 나온다고 봐야 합니다. 역사가들은 원소가 최대 10만, 조조가 약 4만 병력을 동원했으리라고 봅니다.
1 대 1로 싸우지 않았다!
소설에서 당시 관우는 잠시 조조 휘하에 있었는데, 여기서 안량과 관우의 일기토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이는 사실일까? 아쉽게도 사실이 아닙니다. ‘일기토一騎討’란 말 자체가 중국어가 아닌 일본식 표현입니다. 말 한 필의 대결이란 뜻인데, 중국에서는 ‘단도單挑’라 부릅니다. 진수의 <삼국지>에 보면 장수들끼리의 1대 1대결은 단 네 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장면과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일기토는 양 진영에서 꽹과리나 북으로 사기를 북돋우고, 장수 둘이 나와 말을 탄 채 그림 같은 멋진 대결을 펼치는 것이죠. 하지만 실제 일기토는 난전을 벌이다가 우연히 장수들이 만나 서로 싸우는 형국입니다. 안량 역시 난전 중에 관우의 창에 쓰러집니다. 사실 수백, 수천 명을 지휘하는 장군이 병사들을 놔둔 채 1 대 1 대결을 벌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 포스트는 『토크멘터리 전쟁사 이세환 기자의 밀리터리 세계사 1. 고대편』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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