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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 시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무엇일까?

인문 교양 읽기/교실밖 인문학 콘서트

by 스마트북스 2020. 12. 9.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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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한다

17세기 독일의 합리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신이 무한히 많은 ‘가능 세계’ 중에서 특별히 지금 여기의 우리 세계를 창조하기로 선택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한 신이 다른 세계가 아니라 바로 이 세계를 창조한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금의 이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 중에서 최선이라고 믿었습니다. 라이프니츠 철학에서 신은 완전무결한 존재입니다. 만약 지금의 이 세계가 모든 가능한 세계 중 최선이 아니라면, 그것을 존재하게 한 신의 완벽한 신성이 훼손되는 것이니, 지금의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는 거죠.

1755년에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끔찍한 지진이 발생하여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볼테르는 『캉디드』(1759)에서 ‘팡글로스’라는 허구적 인물을 내세워서 이 세계가 모든 가능 세계 중에서 최선의 세계라고 말하는 라이프니츠 철학 이면의 종교적 낙관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신이 전지전능하고 선한다면 왜 이 세계에서 리스본 지진과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고통과 악이 판을 치는가? 완전무결하고 선한 신에 대한 종교적 믿음과 고통과 악의 문제는 양립 가능한 것인가? 볼테르는 라이프니츠가 철학적 독단으로 이 세계가 최선의 세계일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어이없을 정도로 태평한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것이죠.

볼테르는 “우리의 정원은 우리가 가꾸어야 한다.”라는 모토로 『캉디드』를 마무리합니다. 볼테르가 무신론자였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신성은 도덕적 무정부주의를 막고 관용과 우애의 사상을 지탱해주는 힘일 뿐, 공동체의 정원 가꾸기 같은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일은 그 공동체 성원들의 책임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철학: 더 나은 삶을 위한 사유의 기술』, 유토피아, 2008, 430~432쪽)

 

지금, 어떤 질문이 필요한가?

내가 나의 정원을 가꾸는 일보다 ‘우리의 정원’을 가꾸는 일이 더 어렵고, 한 사람이 열 발자국 전진하는 일보다 ‘열 사람이 한 발자국 전진하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적 재난과 맞닥뜨려서 각 나라, 각 공동체가 그동안 어떤 가치를 우선시하고, 어떤 것을 도외시해 왔는지가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감염 예방을 위해 비대면과 비접촉이 예사가 되어버린 이 시간, 조용히 자신이 누구인지 되물으면서 반성하고 소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길로 가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이 생애를 성공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때 다음과 같은 물음이 중요한 축이 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즉 역량과 소망, 해야만 하는 것들을 가늠하는 가운데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반성하게 되죠. ‘나’라는 말을 붙잡고서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어디로 가는 중이었는지 끊임없이 되새김하는 것이 내가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입니다. 그런 반성과 성찰 없이는 자기 스스로에 대해 착각하거나 남들의 의견을 자기 생각인 양 받아들이면서 세상이나 상황에 끌려가는 삶을 살게 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성찰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의하고 경계할 점이 있습니다. 나를 돌아보면 거기에 있는 것은 나의 이미지[아상(我相)]입니다. 보통 내가 나를 보는 눈도, 남들을 파악하는 눈도 어려서부터 키워집니다.

하지만 내가 나를 보는 눈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자신이 이러저러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마땅치 않은 것, 껄끄러운 것, 부끄러운 것은 애써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자신과 솔직하게 마주하기보다는 변명과 방어로 회피하기 십상입니다.

또한 내가 남들을 보는 눈도 생각보다 정확하지 않습니다. 남들을 이러저러하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만, 대개는 자신이 남에게 투사한 기대와 환상이 합쳐진 결과이거나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이기 쉽습니다.

따라서 바깥으로 달아나는 시선을 되잡아 돌려서 제대로 돌아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평소에도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티끌 가지고 왈가왈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일입니다.

아울러 나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에 있는 나의 이미지를 ‘나’라고 확신하며, 자기 이미지를 고정하고 집착하는 것[아집(我執)]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이미지를 나의 속성이라고 착각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를 테면 ‘나=성공한 사람’, ‘나=실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성공이나 실패를 나의 속성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뚱딴지 같이 거만하고 잘난 체하는 마음이 들거나 괜스레 주눅 들기 시작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나라는 존재는 그렇게 속성을 부여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있고, 그다음에 그로부터 비롯된 가깝고 먼 온갖 관계들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은 동시적인 것이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으로 던져지며, 관계 위에 존립해 있다. 관계에 앞서 자아가 선재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곧 관계다.  _이수태, 『어른 되기의 어려움』 중에서

“너 자신을 알라!” 고대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새겨져 있었다고 알려진 경구입니다. 그런데 카이레폰은 델포이 신전에서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관의 신탁을 받고 이를 친구인 소크라테스에게 전했습니다.(즉, 소크라테스의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무지의 지’가 최고의 지혜라는 것이죠) 소크라테스는 정말 그 신탁이 맞는지 궁금해하면서 아테네에서 지혜롭다는 자들, 뭔가 적어도 한 분야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는 자들을 만나 대화를 청했고, 그 물음과 답을 담은 대화들을 그의 제자 플라톤이 『대화편』이라는 책으로 남겼습니다.

만일 내가 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내가 누구인지 물음을 던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라는 질문을 받아도 그저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답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나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물음이 떠오르지 않죠. 자신을 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을 조용히 들여다볼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만일 내가 ‘X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면, 굳이 그것이 무엇인지 물음을 던지는 일이 없을 것이고, 답을 더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대개는 자신에게 편하거나 기존에 있던 선입견만으로 만들어진 답에 만족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물음이 없다면 더 이상의 배움도, 앎도 없습니다.

 

이 포스트는 『교실밖 인문학 콘서트』(백상경제연구원) 3장 철학하는 삶이란(김숙)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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