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입사 지망생을 혼란에 빠트리는 과목이 바로 ‘작문’이다. 논술만을 평가하는 다른 업종과 달리 기자, PD, 아나운서 지망생은 별도의 작문 시험을 치른다(최근에는 현대자동차 같은 대기업도 ‘역사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작문 시험을 치르고 있다).
실제 많은 언론사 합격생들은 논술보다 작문 쓰기가 더 어려웠다고 입을 모은다.
작문
作文을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글을 짓는다는 뜻이다. 이 모호함은 곧잘 엉뚱한 해석으로 흐른다. 주제어를 보고 떠오르는 생각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죽 나열하는 식이다. 말이 좋아 의식의 흐름이지, 사실은 감성 과잉과 무無 논리에 가깝다.다수 지망생의 글은
SNS 게시글과 시험 작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사회 이슈와 메가트렌드, 통찰과 단상을 가르는 명쾌한 선線은 없기 때문이다.굳이 사회적 이슈를 다루지 않아도 삶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 을 다루었다면 시험 작문의 범주에 들어간다.
삶에 대한 수준 높은 성찰은 이런 것이다. 대다수가 별 고민 없이 받아들였던 삶의 명제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핵심은 전형성을 탈피한 자신만의 철학이 녹아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지난 2014년 개봉한 <위플래쉬> 같은 영화가 그랬다. 이 영화는 꿈의 파괴적인 속성을 보여준다. 최고의 드럼 연주자가 되려다 몸과 마음에 회복 못할 상처를 입는 주인공의 삶을 보여주며,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언제나 아름답고, 꿈이 있는 삶이 행복하다는 통념에 서늘한 반론을 제시한다. 이 영화처럼 누구나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삶의 명제를 비틀면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춘 글을 쓴다면 상당히 매력적인 시험 작문이 된다.
작문을 통해 언론사가 파악하고자 하는 요소는 두 가지다
. ① 메시지의 독창성, ② 전개의 흡인력이다.작문도 기본적으로 시험 글이다. 메시지의 명확성, 글감의 힘, 구성의 중요성 같은 시험 글의 특성은 작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만 작문은 논술보다 ‘두괄식’에서 자유롭다. 기본적으로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스토리텔링은 보통 기승전결 구조로 전개된다. 이중 핵심 메시지는 방향을 전환하는 전轉 부분에 배치된다. 전체 분량의 절반 이상 지났을 때 진짜 메시지가 나온다는 뜻이다.
논술이 글의 서두부터 주장을 치고 나가야 한다면, 작문은 독자가 글 후반부에 자리한 핵심 메시지까지 읽어 내도록 초·중반부를 최대한 흥미롭게 구성해야 한다.
주제: 대학 생활을 돌아보며 아끼는 후배에게 편지를 쓰다
2013년 신입사원 공채 조선일보 작문 시험
“조그만 회사라도 일단 다니는 게 낫지 않겠니? 나도 그렇게 시작했어.”
충격이었어. 내가 세대 차이 난다고 무시하던 아빠가 누군가의 ‘멘토’였다니 말이야. 아빠의 후배라는 그 사람은 삶의 고비마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청하곤 했지. 내가 뜬금없이 아빠 얘기를 꺼낸 건 요즘 네가 빠져있는 ‘멘토 중독’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야.
꽃 피는 봄, 대학가엔 멘토 열풍이 한창이야. 김미경, 김제동, 박찬욱…….유명한 멘토들이 학교를 방문할 때마다 너는 마치 자석처럼 끌려가곤 했지. 그러나 그 결과는 실망스러웠을 거야. 하나 마나 한 소리라며 불평하는 네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해. 그래, 나도 너와 똑같았어. 기대하고 갔다 실망하고 돌아왔지.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이치였어. 그들이 걱정하는 건 ‘청춘들’이지 ‘너의 청춘’은 아니니까. 애초에 너의 상황에 딱 맞아 떨어지는 ‘맞춤형 멘토링’ 같은 건 있을 수가 없는 거지.
게다가 넌 무엇을 물어야 할지 충분히 고민도 하지 않았잖니. 질문에 대한 고민을 건너뛰고 듣는 답은 네 삶에 아무런 울림을 줄 수 없단다.
그제야 아빠가 떠올랐어. 갑자기 웬 아빠냐고 하겠지만, 사실 아빠와 멘토는 관계가 깊어. 멘토의 어원 자체가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이 있거든. 호메로스가 트로이전쟁 탓에 집을 비우게 되자 친구 멘토르mentor에게 아들을 부탁한 게 멘토의 시작이야. 그러니 아빠가 계시는 우리는 굳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 멘토를 쫓아다닐 필요가 없는 거지. 아빠의 멘토링이 아무래도 의심스럽다고? 그래 나도 처음엔 그랬어. 하지만 아니더라. 아빠만큼 내 상황을 빠삭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없고, 내 미래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해주는 사람도 없지. 무엇보다 접근성이 뛰어나잖니.
아침저녁 식탁에서 마주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네 가슴에 삶에 대한 물음이 똬리를 틀 때면 언제든 질문할 수 있지. 아빠는 뻔한 성공 스토리가 아닌 사실적인 실패담을 잘 버무린 조언을 해주실 거야. 그러니까 굳이 우리가 멘토에 목맬 필요는 없는 거야. 이제 아빠에게 멘토의 자리를 돌려주면 어떨까.
이 글을 썼던 2013년 상반기에는 반反 멘토 열풍이 메가트렌드였다.
2012년 하반기는 김미경, 김제동, 박찬욱 같은 문화예술계 인사가 청년의 멘토로 등장해 콘서트 형식으로 조언을 건네는 게 트렌드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 같은 현상에 대한 비판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멘토에 환호하는 건 기형적인 사회구조를 만든 기성세대에게 면죄부는 물론 권위까지 부여하는 것이란 반발이 나온 것이다. 이같은 주장에 합류하는 논객이 늘어나면서 어느새 ‘반 멘토론’이 새로운 메가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 글은 ‘반 멘토론’이라는 메가트렌드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멘토의 어원을 언급하면서, 멘토를 무작정 부정하기보다는 아버지에게 그 역할을 맡겨보자는 새로운 메시지를 담았다. 멘토 현상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통찰을 담은 이 글은 입사 시험을 통과했다.
이 글은 『뽑히는 글쓰기 : 시험에 통하는 글쓰기 훈련법』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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