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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제도,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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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개정안은 세입자 보호를 위한 이른바 '임대차 3법' 중 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 상한제 도입 등이 주요 내용입니다. 또 전세가가 오를 것이다, 전세가 없어질 것이라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전세, 희귀한 제도

우리에게는 전세라는 제도가 매우 익숙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이런 제도가 있는 나라는 거의 없어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도 전세제도를 매우 신기해합니다.

볼리비아에 우리의 전세와 거의 유사한 ‘안티끄레티꼬(anticrético)’라는 계약이 있긴 하나 볼리비아 전체 주택 거래의 5% 정도만을 차지할 뿐입니다. 전세제도는 전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에만 있는 제도라고 해도 무방하며, 그만큼 부동산 임대차를 둘러싼 한국의 사회・경제적인 상황이 매우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세, 집주인에게 불리하다?

우리는 전세계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전세는 집주인에게 불리한 계약입니다. 아니, 세입자들이 집주인들의 온갖 갑질에 얼마나 시달리는데, 그런 말이냐고요? 숫자로 따져보겠습니다.

만일 집주인이 1억원 아파트를 7천만원에 전세를 주었다면, 집주인 입장에서는 자기 집을 세입자에게 쓰도록 내어주는 대가로 전세보증금을 무이자로 빌리는 셈입니다. 이 돈을 은행에 예금하면, 연이자율이 2%일 경우 연간 140만원의 이자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재산세나 중개수수료 등의 부대비용은 계산상 편의를 위해 없는 셈 치겠습니다)

반면 만약 집을 매도하여 1억원을 은행에 예금한다면 연 200만원의 이자가 생기게 됩니다.

만약 월세로 돌리면 어떻게 될까? 보통 월세 수익률은 은행의 예금금리보다 2~3% 정도 높은 수준에서 결정됩니다. 예금금리가 2%라면 월세 수익률은 약 5%일 것이고, 집주인은 월세로 연 350만원의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관리비로 약 50만원을 지출한다고 치면, 결국 최종적으로는 약300만원의 수입이 생기게 되죠.

은행 금리가 2%라고 전제하고 각각의 경우를 간단히 정리해보겠습니다.

전세: 전세금 7천만원의 이자 수익 140만원

매각: 집값 1억원의 이자 수익 200만원

월세: 임대 수익 350만원에 각종 비용 50만원을 제한 300만원

 

집주인 입장에서 전세는 이처럼 구조적으로 수익률이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저런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집주인 입장에서는 집값과 전셋값의 차액만큼 이자 수익을 손해보니까요.

 

집값 상승에 대한 확신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전세가 이처럼 일반화되었을까요? 한국의 집주인들이 바보라서 이런 불리한 전세 계약을 하는 것일까요? 집주인들이 ‘개념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전세 계약이 계속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먼저 집주인들이 주택가격이 꾸준히 오른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집값이 오른다는 기대가 있다면, 돈이 있는 사람들은 집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확보한 집을 전세로 돌림으로써 사용가치를 포기하는 대신 집값 상승분을 취하는 것이죠. 만약 집값이 오른다는 기대가 없다면 월세를 꼬박꼬박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합니다.

한국은 부동산 불패의 신화가 남아 있는 나라입니다. 역대 통계를 봐도, 부동산 가격이 하락한 해는 주택 200만 호 공급의 여파로 주택가격의 안정기가 시작되던 1993년, 그리고 외환위기로 나라가 망한다는 절망감에 빠졌던 1998년의 두 해뿐이었습니다.

1970~80년대는 그야말로 내내 부동산 광풍이 불었던 시기였죠. 1970년대 말에는 연간 전국 지가상승률이 50%에 달했고, 3저호황이 한창이던 1980년대 후반에도 상승률이 30%에 가까웠습니다. 서울의 주택가격 상승률은 이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그 무렵 재테크의 제1원칙은 당연히 부동산이었고, 부동산을 얼마나 잘 확보하느냐에 따라 부자와 빈자가 갈렸습니다. 그러니 돈이 있는 사람은 얼른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이 집에서 나온 전세금으로 다음 집을 사는 식으로 자산을 불렸습니다. 과거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가계대출에 매우 인색했습니다. 당시 은행은 개인에게 문턱이 매우 높았고 대출 금리도 매우 비쌌기에 은행 대출 대신 전세를 통해서 돈을 마련했고, 이 돈으로 다시 집을 사는 과정을 반복한 것입니다.

돈 빌리기 어려운 금융 시스템

전세제도가 발전한 또 다른 이유는 과거에 우리나라가 부동산 관련 금융 시스템이 발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이 돈이 필요할 때 은행이 돈을 잘 빌려준다면 굳이 수익률 손해를 감수하면서 전세를 줄 이유가 없죠.

과거 한국의 금융기관들은 가계대출에 매우 인색했습니다. 국가의 모든 자원은 기업투자에 집중되었으며, 은행 대출 중에서 가계대출의 비중은 10% 미만이었습니다. 1960년대 경제개발 계획 이후 가계의 저축률은 20%가 넘었습니다. 가계는 죽어라 저축을 하고, 기업은 이 돈을 빌려서 산업에 투자하 는 시스템이었죠. 은행 입장에서도 가계대출보다는 기업대출이 규모 도 훨씬 크고 관리도 쉬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수십만, 수백만 명의 개인고 객을 대상으로 한 가계대출보다 큰 것 한방으로 대형 기업대출을 취급 하는 것이 훨씬 유리했던 것이죠.

전세, 유지되기 힘들다

한국의 주택 임대 시장은 그동안 월세와 전세가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전세는 월세에 비해 비용부담이 적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지만, 개인들에게 감당하기 힘든 목돈을 요구하는 단점이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법적 분쟁이라도 생긴다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을 사기 등으로 날리는 일도 허다합니다.

하지만 금융 시장이 발달함에 따라 전세가 계속 유지되기는 힘들 것입니다. 거액의 전세자금을 융통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유일한 주거 선택지가 월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기업의 임대 시장 진출은 개인에게만 쏠린 시장의 구조를 다양화할 뿐만 아니라 온갖 전근대적인 관행이 판치는 시장을 현대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있습니다.

이 포스트는 『대한민국 부동산 7가지 질문』에서 발췌, 재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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