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당신은 캣스킨을 벗을 준비가 되었나요?

인문 교양 읽기/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

by 스마트북스 2018. 8. 3. 17:43

본문

당신은 캣스킨을 벗을 준비가 되었나요? 


캣스킨 | Catskin
너무나도 아름다운 금발머리 왕비는 죽음이 임박해 왕에게 말했다.
약속해주세요. 나만큼 예쁘고 나같은 금발인 여인을 만나지 못하면 다시 결혼하지 않겠노라고.” 왕은 약속을 했고, 왕비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신하들이 다시 결혼할 것을 오랜 시간 청하자, 죽은 왕비만큼 금발을 가진 아름다운 신붓감을 전국에서 찾았다. 헛수고였다.
왕과 죽은 왕비 사이에는 딸이 하나 있었다. 공주가 자라 성년이 되자 왕은 죽은 왕비만큼 아름답고 죽은 왕비 같은 금발인 여성은 공주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가 자신과 결혼하려하자 공주는 조건을 내건다.
누구와 결혼하든 난 세 벌의 드레스를 먼저 받아야겠어요. 태양과 같이 빛나는 금빛 드레스 한 벌, 달처럼 빛나는 은빛 드레스 한 벌, 그리고 별빛처럼 눈부신 드레스 한 벌이요. 그리고 왕국에 사는 모든 동물들 그러니까 천 마리 동물의 모피로 만든 망토도요.”
왕은 이 물건들을 공주에게 보냈다. 공주는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금목걸이 하나, 금팔찌 하나, 금브로치 하나 그리고 세 벌의 드레스를 가지고, 천 마리 가죽으로 만든 망토로 몸을 감싼 후 얼굴에 검댕을 칠한 후 아버지의 궁에서 도망쳤다. 우여곡절 끝에 공주는 이웃나라 볕도 들지 않는 계단 밑의 방에서 살며 부엌데기로 일하게 되었다.
연회가 벌어지던 어느 날, 공주는 요리사의 허락을 받아 잠시 시간을 번 후, 궁전 꼭대기 다락에 올라가 몸을 씻고 태양처럼 빛나는 금빛 드레스를 입고는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왕이 다가와 춤을 청해서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나자 여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공주는 다시 캣스킨을 걸치고 부엌데기로 돌아갔다. 공주는 왕이 먹을 수프 안에 금반지를 넣었다. 왕은 수프를 먹다가 금반지를 발견하고는 요리사와 공주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모르는 일이라며 잡아떼었다.
다음번 무도회에선 공주는 은빛 드레스로 갈아입고 왕과 춤을 추고 사라져버렸다. 이번에는 금목걸이를 수프에 넣어서 왕에게 올렸다. 이번에도 모르는 일이라며 둘러댔다. 그다음 무도회에서는 캣스킨은 별빛처럼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왕과 춤을 추고 사라졌다. 그후 왕에게 올리는 수프에 금브로치를 넣어 올렸다. 이번에는 옷갈아입을 시간이 부족해 별빛 드레스 위에 캣스킨을 걸친 채 수프를 만들었고, 손가락 중 하나에 검댕을 묻히지 않고 내버려두는 실수를 한다. 수프에서 금브로치를 발견한 왕은 요리를 한 공주를 불러오라고 한다. 왕은 공주의 하얀 손가락을 보고는 손을 잡고 망토를 벗기고 찢어버린다. 그러자 별빛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고, 더 이상 정체를 숨길 수 없었던 그녀는 검댕을 지우고 자신의 본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모습에 왕은 왕비로 삼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른다.


수천 가지 내면에 한 가지 얼굴

사진 출처 : The Brothers Grimm and Louis Rhead, Grimm's Fairy Tales, Stories and Tales of Elves, Goblins, and Fairies (New York: Harper and Brothers, 1917) 271

캣스킨의 시작 부분을 근친상간의 코드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아버지에게서 도망 나오는 장면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외모와 재능을 가지고 여자가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하는 메시지라고 읽고 싶다. 공주는 어머니에게서 외모를 물려받지만, 아버지에게서는 세 벌의 드레스와 세 점의 보석, 그리고 캣스킨을 선사 받는다. 사실 세 벌의 드레스와 세 점의 보석은 한 여성 내면의 빛나는 본질을 나타내는 장치들인지라 부정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외모와 자신이 지닌 모든 빛나는 자질들을 다 꽁꽁 싸서 가리는 데에 사용된 캣스킨은 대체 왜 아버지에게 선사 받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 동화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대체 아버지에게 받는 이 캣스킨은 무엇일까?
천 마리의 동물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 만든 망토라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천 마리 분의 고통과 슬픔이 들어간 망토는 여자에게 몇 가지 얼굴만 보이라고 요구하는 사회의 압박 앞에 선 여자의 고통과 슬픔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천 가지 동물가죽으로 상징되는 한 사람 내면의 수많은 얼굴은 천사 같은 아내, 착한 딸 등 남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몇 안 되는 얼굴만 내보이며 살라고 하는 사회의 압박 앞에서 고통스러워 숨 막혀!’ 하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다. 과연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는 여자에게 딸로 자라 아내가 되라는 딱 그런 요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의 본질은 남자들이 원하는 얼굴 아래 가려진다. 그리고 여자는 너무나 딱 들어맞게도 자신의 본질을 내보이지 못하고 왕의 궁전에서 부엌데기가 된다. 귀하디귀한 공주로 태어나 왕비가 될 줄 알았는데 한 남자의 부엌데기가 되어버리는 현실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낯익은 상황이다. 사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에게 해도 괜찮다고 하는 일들은 대개 부엌데기 같은 일들이다. 그런 반복적인 일들을 하며 여성들은 슬픔에 사위어간다.

캣스킨, 벗기 위해 쓰는 것

사랑은 여자의 본질을 알아봐 주는 남자가 나타나야 가능하다. 그리고 캣스킨에서 의미심장한 점은 여자가 자신의 본질을 남자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빛 드레스, 달빛처럼 빛나는 은빛 드레스, 별빛처럼 빛나는 드레스로 상징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도회에 등장해 남자에게 보일 뿐 아니라, 남자가 먹는 수프 안에 자신의 빛나는 자질들을 나타내는 금반지, 금목걸이, 금브로치를 넣어 자신을 알린다. 물론 자신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모두가 알아보는 건 아니다.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만 알아보고, 사람의 품격을 아는 이만 음미한다. 이웃나라의 왕은 알아볼 줄 아는 남자이고, 여성이 가진 고귀한 자질들을 음미할 줄 아는 남자이다. 수동적으로 누군가 나타나 자신을 알아봐 주길 기다리지 않고, 캣스킨을 뒤집어쓰고 험한 노동을 하며 그 무게에 깔려 시름에 젖어 사그라지는 대신, 여자는 몰래몰래 캣스킨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온전히 음미하는 과정, 즉 여성이 가진 보석 같은 내면을 맛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왕은 여자가 만든 수프 속에서 금붙이들을 발견한다. 입으로 맛보고 혀끝으로 안다는 것은, 소화시켜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게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다다른다.
왕이 캣스킨을 벗겨 찢어버린다는 것은, 여자의 아름다움과 그 내면의 보석을 온전히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 드디어 여자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고 남자가 여성을 구원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사랑의 힘은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넓혀 한 사람으로서 더욱 오롯해지게 만드는 데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지키던 인습의 경계를 뛰어넘고, 나란 사람이 편했던 가치관을 허물어, 나와 다른 이가 들어 올 수 있도록 해주는 과정이다. 내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침탈당할 수도 있으나, 내 경계를 넘어온 타인을 허락해서 나의 지경은 넓어진다. 드디어 타인의 우주와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그게 바로 캣스킨을 찢는 행위이다.

누가 알아봐 주기 전에 내가 먼저

 
여자로 태어나 많이 답답했다. 여자답게 살라는 사회의 요구에 대한 반발로 여성적인 모든 것을 내 안에서 다 거부하고 배척하며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여자답든 답지 않든, 그냥 나다운 것으로 편하고 자유로워지기까지 먼 길을 돌아왔다. 온전히 내 보석을 알아봐 주는 사랑을 만나서 다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 사랑을 만나 내 경계가 허물어져서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한 여자의 아름다움과 그 내면의 보석을 보고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 열렬히 사랑을 나누고 맺어지는 일은 이성애자인 여자에게는 실로 큰 축복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미성숙한 만큼 아직도 미성숙한 남자들을 만나, 여러 번 부서지는 경험들이었다. 때로는 처절하게 부서져서 조각조각 파편이 된 나를 주워 모아 다시 일으키기 힘들었던 적도 있었고 그 상처로 몇 년이고 어느 누구도 만나지 못했던 그런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사랑했던 경험이 모두 다 내 지경을 넓힌 것은 맞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를 아름답다 알아봐 주고, 누가 내가 지닌 보석을 알아주기 이전에, 내가 스스로 나의 아름다움을 알고, 내가 내 보석들을 아는 일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햇빛처럼 빛나고, 달빛처럼 빛나며, 별빛처럼 스스로 빛을 낸다는 것은 내면의 자기 인정과 존중의 힘이 묵직한 닻처럼 드리워졌을 때 빚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래도 늘 이전보다는 더 빛날 수 있게 되었고, 이전보다는 더 잘 사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또 깨질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또다시 찾아오는 사랑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