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모는 엘리자의 목욕물에 두꺼비 세 마리를 넣어주며 한 마리는 머리에, 한 마리는 이마에, 한 마리는 가슴에 붙어서 흉하게 만들라고 주문을 외운다. 그러나 엘리자가 목욕을 하고 나오자 몸에 붙었던 세 마리 두꺼비는 세 송이 양귀비꽃이 되어 목욕물 위에 둥둥 떠 있다.
계모는 진짜 계모라기보다, 뒤틀어진 모성, 여성성의 상징이다. 엘리자에게 붙인 세 마리 두꺼비는 딸을 키우며 부족한 어미들이 뱉어내는 흉한 말들이다.
네 아비를 닮아 이기적인 것, 피부가 흰 것들은 원래 자기밖에 몰라(이건 내가 듣고 자란 말이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남아선호가 심한 집안에서 태어난 딸들이 듣고 자란 말이다), 커서 제 서방 잡아먹을 년(기가 센 여자들이 듣고 자란 말이다), 어미를 닮은 창녀(어미가 가정을 버리고 나간 집에서 자란 여자가 남자와 연애만 하면 키워준 그 할미가 퍼부었던 말이다. 이 얘기를 하며 당사자는 펑펑 울었다). 이런 두꺼비들을 어머니들이 뱉어낸다. 이건 어머니 삶에 돋친 가시이고, 딸에 대한 부정적인 투사이다.
인간은 다층적인지라 어미는 딸을 두고 나처럼 살지 말라는 사랑도 보이지만, 자신의 싫은 모습을 닮은 딸, 혹은 애증의 대상인 남편을 닮은 딸, 혹은 자신에게 없는 것이 있는 딸을 보며 저렇게 가시들을 쏘아댄다.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는 이처럼 양가감정이 많이 깃들어 있다. 어머니는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딸들을 세상으로 밀어보내면서도, 정작 자신이 성취하지 못한 것을 성취하고,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았던 기회를 누리는 것을 보며 질시와 고통을 느낀다. 더불어 나날이 늙어가는 자신에 비해 꽃처럼 피어나는 딸들을 보며 시어 터지기도 한다.
외모가 달라진다고 딸을 못 알아보는 것, 여자의 가치를 외모에 두는 전형적인 남성들의 시선이기도 하다. 딸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주지 않고 본모습을 보지 못하며, 여자의 가치와 역할은 딱 여기까지뿐이라고 못 박는 가부장적 아버지의 모습이다. 어머니는 농부의 딸처럼 세상을 모르도록 순진하게 딸을 키우지만, 동시에 그 젊음과 가능성을 질투하기도 한다. 이럴 때 딸들은 아버지의 평가와 어머니의 애증을 다 두고 떠난다. 심리적으로 독립할 때가 된 것이다. 엘리자는 분노하며 대들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 대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성을 떠난다.
열한 마리의 백조가 된 오빠들은 과연 무엇을 나타낼까? 엘리자가 합해져서 열둘이 되어야 비로소 이 형제자매는 통합을 이룬다. 더구나 백조로 변한 오빠들을 다시 사람으로 되돌려서 재회와 통합을 이루므로, 오빠 열한 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 여성 속의 남성성인 아니무스와 여성성이 통합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원래 숫자 12는 고대 문명, 특히 동양 문명과 유대 문명에서 완전함, 혹은 한 개체의 통합성integrity을 나타내는 수이다. 기독교에서 이스라엘이 12부족으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의 예표 token(장차 미래에 구현될 것에 대한 상징)가 되는 이유도, 성 삼위일체인 숫자 3에 온 세상을 나타내는 네 개의 방위 4를 곱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문화권에서 숫자 12는 사실 어머니 신Divine Mother을 나타내는 완성의 수이기도 하다. 그래서 열둘이 하나가 되는 이 동화의 마지막 결말은 한 여성의 내적 성장의 여정이 완성됨을 의미한다.
자신 속의 아니무스를 회복시키는 과정은 지극히 어렵다. 거친 쐐기풀에 피 흘리고 눈물을 흘려가며, 어떤 일이 있어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겪어야 할 고난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 쐐기풀이 죽음을 나타내는 묘지, 혹은 깊은 무의식을 나타내는 동굴가에만 자라는 것 역시 의미심장하다. 남성성과 여성성의 통합을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고난과 역경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엘리자는 죽음의 상징인 묘지에서 자란 쐐기풀을 꺾어서 침묵과 고난 속에 옷을 짜야 하는 여정을 따라간다.
왕은 사냥을 나왔다가 우연히 엘리자를 얻는다. 전리품trophy으로서 남성이 여성을 얻는 과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여자는 그렇게 납치되듯 성으로 끌려간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된다. 많은 남녀 간의 관계는 이러하다. 여자를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을 사냥을 해서 전리품을 얻는 것으로 여기고, 사회에서 성인이라면 으레 통과의례를 거치듯이 결혼을 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렇게 여자의 본색을 모른 채, 자신의 옆에 데려다놓고 시작되는 관계에 사랑이 움튼다는 건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자들은 가부장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가 한 남성에게 선택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그 환상에 도취되어 감히 사랑도 한다. 이쯤되면 사랑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을 바라보는 왕의 시선과 관심에 엘리자의 심장이 뛰고 마음도 열린다. 그러나 엘리자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어쩌면 여성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금하는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이 자기 통합의 여정을 거치는 것 자체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쐐기풀로 옷감을 짜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옷감을 짠다는 것은 결국 이야기를 만드는 것, 서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회에서 묵살되지만 여성들만의 언어로 이야기를 짜내는 것, 그 고통스러운 과정이 결국 여성의 힘이 되기 때문이다.
전리품과 사냥꾼으로 시작된 관계에는 애초부터 비극이 잉태되어 있다. 외모에만 혹해서 보이지 않던 본색이 남자의 눈에 뜨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여자의 모습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남자의 귀에 가부장의 상징인 대주교가 속삭이기 시작한다. “저 여자는 마녀라고!”
사실 남자들은 자신들이 미처 몰랐던, 혹은 알았어도 자신의 여자에게만은 기대하지 않았던 여성 속의 강인함, 고집, 이기심 등을 보고는 놀란다. 시간이 지나면 겉모습 뒤에 가려져 있던 진짜 모습들이 드러나니까.
그럴 때 대부분 남성은 자신의 남성성이 이러한 여성의 모습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일까 고찰하는 대신, 자신의 작은 에고ego를 지키는 방어기제를 발동시킨다. ‘내 (작은) 에고를 위협하는 여자는 마녀이다’라고 말이다. 그렇게 비난하고 저주하며 자신의 세계에서 없애겠다고 사형 선고를 내린다. 많은 연애와 결혼은 이렇게 끝이 난다.
관계는 이런 식으로 이미 끝났는데, 공동으로 양육해야 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임과 남들 눈에 멀쩡해 보여야 한다는 체면으로 유지되는 결혼만큼 비극적인 관계도 없다. 하지만 많은 결혼생활이 이런 듯싶다. 어설픈 로맨스 신화에 열중하는 여성, 그리고 때가 되었으니 사회적인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압박에 몰린 남자의 결혼은 대부분 겉모습은 유지할지라도 실제로는 이렇게 파국을 맞는다.
엘리자에겐 본래 내면의 힘이 있다. 계모가 목욕물에 넣어준 두꺼비들을 모두 양귀비꽃으로 변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즉, 자기 구원에는 독을 꽃으로 바꾸는 힘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찌해서든 타인들과 만나며 계속 다친다. 나의 욕망이 과도하게 나아가 다치는 것인지, 타인들이 비정해서 다치는 것인지 때로는 헷갈린다. 때로는 이유 없이(혹은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타인들의 증오와 이기가 나를 찔러오기도 한다. 그럴 때 이러한 독을 꽃으로 바꾸는 힘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믿고 중심을 감싸 안는 힘이다.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으며, 독립적이고 호두알처럼 견실한 자아는 그걸 능히 해낸다. 타인의 평가에 폭풍우에 휘말린 조각배처럼 자신이 요동치는 것을 허하지 않을 힘을 키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여 하나를 더해야 한다. 바로 동물로 변한 자신 속의 아니무스를 사람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어린 시절 열한 명의 왕자와 엘리자가 남녀구분 없이 왕자와 공주로 귀하게 자라는 시기는 내면의 남성성과 여성성이 분화되지 않은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이 자라나면서 초경 등의 신체의 변화를 통해 여성성을 자각하면, 그때부터 아니무스가 동물로 변해 날아가 버리는 자기 내부의 왜곡이 일어난다. 그렇게 내면이 분리된다. 가부장 사회가 요구하는 얼굴만 보이라는 압박이 시작되고, 아버지인 왕은 공주의 흉한 모습만을 보고 판단하고 내쫓는다. 또한 다른 여성들은 남성 앞에서 경쟁자가 되어 또 다른 여성의 아름다움을 훼손하려 든다. 남자 앞에서 평가받는 지극히 의존적이고 불안한 여성의 자의식은 이렇게 키워진다. 남자에게 아름답다고 평가받아야 비로소 남자의 성에 살 자격을 얻는 빈한한 자기 가치임에도, 거기서 높은 평가를 받은 여성들은 그걸 자랑스러워하거나, 행여 누가 자신보다 높은 평가를 받을까 소문과 중상으로 서로의 가치를 훼손하며 경쟁하는 아귀다툼이 시작된다.
그래서 엘리자는 아버지 성을 떠나 숲으로 간다. 자신의 가치를 되살리기 위한 여정을 떠나며, 오래된 지혜의 도움을 받고, 분열되었던 자신의 남성성을 찾는다. 그리고 사랑의 정상과 죽음의 골짜기를 거치며 쐐기풀로 옷감을 짠다. 자신의 이야기, 서사를 엮어 이야기를 만드는 힘, 자신의 가치를 빚어내고, 그걸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하는 순간, 드디어 분열에서 벗어나 통합된 자신을 이룬다.
진정한 사랑도 그때 온다. 통합되어 완성된 여자는 그 내면에 대지의 여신이 주는 풍요로움을 한껏 펼칠 수 있어 죽은 나무에서도 잎이 돋고 꽃이 핀다. 힘들었던 삶이 자기 깨달음을 통해 비로소 풍요로워진다.
결코, 구원은 나를 납치해가는 왕에게서 오지 않는다. 별안간 왕비로 격상되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외려 사랑에 버림받고 바닥으로 떨어져 추스르고 버티다가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고 빛나는 이마로 세상을 마주할 수 있을 때, 그녀의 가치를 알아본 사랑이 찾아온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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