캣스킨의 시작 부분을 근친상간의 코드로 읽는 해석도 있지만 아버지에게서 도망 나오는 장면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외모와 재능을 가지고 여자가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하는 메시지라고 읽고 싶다. 공주는 어머니에게서 외모를 물려받지만, 아버지에게서는 세 벌의 드레스와 세 점의 보석, 그리고 캣스킨을 선사 받는다. 사실 세 벌의 드레스와 세 점의 보석은 한 여성 내면의 빛나는 본질을 나타내는 장치들인지라 부정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외모와 자신이 지닌 모든 빛나는 자질들을 다 꽁꽁 싸서 가리는 데에 사용된 캣스킨은 대체 왜 아버지에게 선사 받는 것인지를 알아내는 것이 이 동화를 이해하는 관건이다. 대체 아버지에게 받는 이 캣스킨은 무엇일까?
천 마리의 동물을 죽여 그 가죽을 벗겨 만든 망토라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 천 마리 분의 고통과 슬픔이 들어간 망토는 여자에게 몇 가지 얼굴만 보이라고 요구하는 사회의 압박 앞에 선 여자의 고통과 슬픔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천 가지 동물가죽으로 상징되는 한 사람 내면의 수많은 얼굴은 천사 같은 아내, 착한 딸 등 남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몇 안 되는 얼굴만 내보이며 살라고 하는 사회의 압박 앞에서 고통스러워 ‘숨 막혀!’ 하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다. 과연 아버지로 상징되는 사회는 여자에게 딸로 자라 아내가 되라는 딱 그런 요구를 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의 본질은 남자들이 원하는 얼굴 아래 가려진다. 그리고 여자는 너무나 딱 들어맞게도 자신의 본질을 내보이지 못하고 왕의 궁전에서 부엌데기가 된다. 귀하디귀한 공주로 태어나 왕비가 될 줄 알았는데 한 남자의 부엌데기가 되어버리는 현실은 우리에게도 참으로 낯익은 상황이다. 사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에게 해도 괜찮다고 하는 일들은 대개 부엌데기 같은 일들이다. 그런 반복적인 일들을 하며 여성들은 슬픔에 사위어간다.
사랑은 여자의 본질을 알아봐 주는 남자가 나타나야 가능하다. 그리고 캣스킨에서 의미심장한 점은 여자가 자신의 본질을 남자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이다. 태양처럼 빛나는 금빛 드레스, 달빛처럼 빛나는 은빛 드레스, 별빛처럼 빛나는 드레스로 상징되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무도회에 등장해 남자에게 보일 뿐 아니라, 남자가 먹는 수프 안에 자신의 빛나는 자질들을 나타내는 금반지, 금목걸이, 금브로치를 넣어 자신을 알린다. 물론 자신의 본질을 보여준다고 모두가 알아보는 건 아니다.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이만 알아보고, 사람의 품격을 아는 이만 음미한다. 이웃나라의 왕은 알아볼 줄 아는 남자이고, 여성이 가진 고귀한 자질들을 음미할 줄 아는 남자이다. 수동적으로 누군가 나타나 자신을 알아봐 주길 기다리지 않고, 캣스킨을 뒤집어쓰고 험한 노동을 하며 그 무게에 깔려 시름에 젖어 사그라지는 대신, 여자는 몰래몰래 캣스킨을 벗어던지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내보인다. 그러나 보는 것만으로 마음을 얻지는 못한다. 온전히 음미하는 과정, 즉 여성이 가진 보석 같은 내면을 맛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왕은 여자가 만든 수프 속에서 금붙이들을 발견한다. 입으로 맛보고 혀끝으로 안다는 것은, 소화시켜 자신의 일부로 만든다는 뜻이다. 그렇게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다다른다.
왕이 캣스킨을 벗겨 찢어버린다는 것은, 여자의 아름다움과 그 내면의 보석을 온전히 알아주는 남자를 만나, 드디어 여자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는 과정을 말한다. 그렇다고 남자가 여성을 구원한다는 뜻은 아니라고 본다. 사랑의 힘은 자신을 둘러싼 경계를 넓혀 한 사람으로서 더욱 오롯해지게 만드는 데에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지키던 인습의 경계를 뛰어넘고, 나란 사람이 편했던 가치관을 허물어, 나와 다른 이가 들어 올 수 있도록 해주는 과정이다. 내가 부서지고 무너지고 침탈당할 수도 있으나, 내 경계를 넘어온 타인을 허락해서 나의 지경은 넓어진다. 드디어 타인의 우주와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그게 바로 캣스킨을 찢는 행위이다.
이 포스트는 『빨간모자가 하고싶은 말』에서 발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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